정유선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가 21일 열린 NC문화재단-주한스위스대사관 다이얼로그에서 발표하고 있다./주한스위스대사관
'의사소통 지원 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가능성'을 주제로 패널토론이 진행되고 있다./주한스위스대사관

“말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소통하지 않는 걸까요?”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의 NC문화재단에서 주한스위스대사관과 재단이 함께 개최한 ‘다이얼로그 기술로 확장하는 소통: 그 가능성과 도전’ 행사가 열렸다. 한국과 스위스의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인간의 소통 능력을 더 확장할 과학기술을 소개하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이날 행사는 기조강연에 나선 정유선 미국 조지메이슨대 특수교육과 교수의 질문으로 시작됐다. 정 교수는 뇌성마비를 가진 한국 여성 최초로 해외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대학 교수로 임용된 인물이다. 2012년에는 첨단 기술을 활용한 강의법으로 ‘최고 교수상’을 받기도 했다.

정 교수는 질문에 이어 이색적인 실험을 제안했다. 그는 “지금부터 옆 사람에게 말없이 자신을 소개해 보자”고 제안했다. 1분 남짓 사람들은 손짓과 눈빛으로 각자를 소개했고, 조용한 웃음들이 오갔다. 말은 없었지만, 소통은 분명히 있었다.

정 교수는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이 사용하는 보완 대체 의사소통(AAC)을 소개했다. AAC는 말로 하지 않는 의사 표현 방법으로, 손짓이나 그림, 문자판, 스마트폰 앱(app, 응용프로그램) 등의 기술들이 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떠올려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순간이 있다”며 “어떨 땐 철자를 하나하나 말하면, 상대가 단어를 유추해 주며 대화를 이어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생 때는 ‘결합법칙’을 말하려다 기역(ㄱ) 발음이 어려워 좌절했었던 적도 있었지만, 박사과정 때 접한 AAC가 삶을 바꿨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기술은 사람을 위한 도구”라며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 있는 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의사소통을 돕기 위한 다양한 기술이 등장했다. 정 교수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홀로렌즈 헤드셋를 이용한 ‘홀로ACC’를 예로 들었다. 증강현실(AR·현실에 가상 이미지를 덧씌우는 기술) 기반의 홀로AAC는 사용자가 편의점에 물건을 올려놓으면 관련 단어나 문장이 헤드셋 안경에 표시되고, 클릭하면 음성이 출력되는 방식이다. 정 교수는 “아직 완전한 단계는 아니지만, 기술은 분명히 소통의 문을 확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 외에도 한국과 스위스의 과학자들이 다양한 의사소통 기술을 조명했다. 이규화 스위스 비스(Wyss) 연구소 연구그룹장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를 활용한 기술을 소개했다. BCI는 사용자의 뇌파를 컴퓨터로 실시간으로 분석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나 문장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그룹장은 “아직은 연구 단계지만, 표정이나 감정까지 BCI로 감지해 아바타(분신)가 대신 표현해 주는 단계까지 진전됐다”며 “세브란스병원과 협업해 한국어에 특화된 BCI도 개발할 것”이라고 했다.

장대현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교수는 언어 장애를 가진 아동을 위한 인공지능(AI) 디지털 치료제를 소개했다. 이 시스템은 아동의 한국어 음성 데이터를 기반으로 특정 발음 오류를 진단하고, 게임 형식의 콘텐츠를 제공해 치료를 돕는다. 장 교수는 “디지털 치료제는 일반적인 치료법의 물리적, 시간적 제약을 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언어 기능 향상을 넘어서 삶의 질과 사회적 참여를 높이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날 연구자들은 기술 발전이 야기할 윤리적 논란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니콜라 빌러 안도르노(Nikola Biller-Andorno) 스위스 취리히대 생의학윤리·의학사연구소 교수는 “의사소통을 돕기 위해 목소리를 복제하거나 뇌파를 해석하는 기술은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으나 사생활 침해에 대한 우려도 동반한다”며 “모든 기술은 사용자와 함께 설계돼야 하며, 표현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사용자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 엔씨소프트 사장인 윤송이 NC문화재단 설립자는 이날 “최근 AI와 신경 보철, 센서 기반 기술 등의 발전이 기존의 소통 방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며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를 묻기보다는 ‘기술이 무엇을 향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결국 기술은 사람을 향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