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과학기술을 책임지는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직원들이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희롱 피해를 당해도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신고를 하더라도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거나, 징계가 유야무야 되는 경우도 있었다.
18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소속 이해민 조국혁신당 의원이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에서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이후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발생한 직장 내 괴롭힘, 성 관련 사건이 51건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단순히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피해자 보호를 위해 최대한 빠르게 사건을 처리해야 함에도 징계까지 300일 이상 걸리기도 했다. 이 기간 피해자들은 2차 가해와 주변의 눈총을 혼자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근무하던 중 성희롱을 당한 피해자 A씨는 지난 17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과방위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나와 조속한 처리를 요구했다. A씨는 표준연이 피해자를 보호해줄 것으로 믿고 신고했지만, 열 달이 넘도록 제대로 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A씨는 표준연에 입사한 이후 4년여 동안 성희롱에 시달렸다. 가해자는 총 3명으로 A씨보다 선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자신을 향한 성희롱이 계속되자 지난 1월 가해자 2명에 대해 기관에 사건을 신고했다. 이후 다른 한 명에 대해서도 신고가 이뤄졌다.
A씨는 당시 신임 원장이 선임된 만큼 기관이 피해 사실을 확인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표준연 감사부는 A씨에게 조속한 처리를 취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9개월이 지나는 동안 가해자들의 징계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A씨가 제출한 증빙 자료는 200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표준연은 지난 3월 가해자 중 2명이 성희롱을 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표준연 규정에 따르면 성희롱 사건은 의결 후 60일 내로 징계가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표준연은 재조사와 보강조사를 반복하며 아직도 징계를 미루고 있다.
징계가 늦어지면서 오히려 A씨도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성희롱 가해자로 지목된 선배 직원 중 한 명이 A씨도 자신들에게 성희롱을 했다며 맞 신고를 한 것이다. A씨가 성희롱을 당했다는 사실이 표준연 내부에서 알려지기도 했다. 일부 직원은 이 같은 내용을 온라인 익명 게시판에도 게시하며 2차 가해까지 이뤄졌다.
A씨는 “피해자를 비방하는 게시글을 기관이 인지했고, 왜곡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님에도 어떠한 조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성희롱을 신고한 것이 너무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표준연 관계자는 “현재 규정과 절차에 따라서 조사를 하고 있으나, 증빙 자료가 워낙 방대해 늦어지고 있다”며 “다음 주 중 징계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해민 의원은 이번 사건이 정부 연구기관이 직장 내 괴롭힘, 성희롱 사건과 관련해 규정이 미비해 벌어진 일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규정에 따르면 사건이 신고되면 조사 기간에 대한 규정만 있을 뿐 고충심의위원회나 징계에 대한 규정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이해민 의원은 “출연연은 사건과 관련한 지침이 있어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있다”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산하 기관들이 제대로 절차와 규정을 따르는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