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본지 특종 보도로 1500년의 잠을 깨고 빛을 보게 된 경주 155호 고분(천마총) 발굴 '천마도'. 이해 8월 25일 자 신문에 실린 컬러 사진이다.


“그림이 나왔답니다, 그림이!”

조선일보 경주 주재 황인석 기자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1973년 8월 23일 밤 10시쯤이었다. 본사에서 경북 경주에 내려와 1주일째 155호 고분(지금의 천마총) 발굴 현장을 함께 취재했지만 ‘대어(大魚)’를 낚지 못해 초조해하던 고학용 기자도 함께 흥분했다. “뭐, 그림이요?”

이들은 이날 낮 발굴 현장 입구 가림막 옆에 나무 상자가 몇 개 놓인 것을 보고 ‘뭔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평소 친분을 쌓아둔 작업 인부의 월성군 집까지 택시를 타고 물어물어 찾아간 길이었다. 인부는 ‘발굴 현장에서 흰 말이 그려진 가죽 같은 물건이 출토됐다’고 확인해줬다.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덧대 만든 ‘장니(障泥·말 탄 사람에게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양쪽에 늘어뜨리는 판)’에 그려진 '천마도(天馬圖·국보 제207호)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고학용 기자는 훗날 “당시는 자석식 전화로 우체국 간 교환을 거치는 통화 방식이어서, 경주에서 전화를 걸면 중간에 누설될 우려가 있었다. 월성군 별정 우체국으로 찾아가 더듬거리며 야간 데스크에게 기사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다음 날 24일 새벽 5시쯤, 기자들이 묵는 여관으로 본사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8월 24일 자 본지 기사는 1면 머리, 타사 보도는 없었다. 대특종이었다.


'천마도' 발굴 사실을 처음 세상에 알린 1973년 8월 24일 본지 1면. 정보가 혼란스러웠던 최초 보도엔 백화수피(자작나무 껍질)가 아닌 가죽 재질로, 채색화가아닌 묵화로 보도됐으나, 다음 날 정확한 분석 결과를 더 자세히 보도했다.


무령왕릉 발굴과 불국사 복원으로 문화유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가던 1970년대 초, 경주 황남동 고분군은 문화재 담당 기자들의 전쟁터였다. 순금 귀고리, 금관 등이 줄줄이 발굴됐다. 천마도 특종은 그중에서도 발군이었다. 천마도는 1500년 만에 빛을 본 우리나라 최고(最古) 그림이자, 우리 미술사의 기원을 다시 따져야 할 만큼 획기적인 사료였다.

‘천마도’ 1년여 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의 교과서와 백과사전을 바꿔 쓰게 한 특종이 나왔다. 1972년 5월 28일 자 본지 1면 머리기사로 보도된 ‘고려금속활자본 직지심경 세계 최초 공인’ 기사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금속활자본 ‘직지(直指)’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75년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았다는 내용. 국내엔 ‘직지’의 존재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직지심경’으로 불릴 때였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금속활자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75년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았다고 보도한 1972년 5월 28일 본지 1면.


신용석 당시 파리특파원은 “유네스코가 ‘책의 역사’ 종합전에 새로 발견된 고려 ‘직지심경’을 전시함으로써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임이) 공인됐다. 유네스코는 이를 계기로 세계 모든 문헌, 교과서, 백과사전을 정정토록 통보 조처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직지’의 원래 제목은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고려 우왕 3년(1377년) 지금의 청주 교외 흥덕사 주자시(鑄字施)에서 인쇄된 하(下)권이 구한말 프랑스 공사의 손을 거쳐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었던 것이다. 신용석은 훗날 “자주 드나들던 국립도서관 직원 귀띔으로 정보를 얻었지만, 막상 취재에 들어가니 프랑스인들은 모두 입을 꾹 닫았다. 평소 친분을 쌓았던 도서관 동양과 책임자 마리 로즈 세규이 여사와 박병선 박사를 설득해 끝내 확인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 시절에도 기자들은 투지로 새로운 취재 루트를 뚫었다. 작은 실마리도 놓치지 않고 끈기 있게 매달렸다. 역사를 고쳐 쓰게 한 문화재 특종은 그렇게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