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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와 국경을 맞댄 미국 남부지역에서 올들어 잇따라 목격담이 들려오고 있는 맹수가 있습니다. 황금색 바탕에 검고 아름다운 털무늬, 송곳처럼 날카롭고 긴 흰색의 수염, 옥구슬처럼 투명해 빨려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를 가진 놈은 바로 재규어입니다. 올 봄에 애리조나에서 세관단속국경단속국과 야생동물국이 설치·운영하는 카메라에 아름다운 자태가 포착됐습니다. 재규어가 미국 땅에 모습을 나타낸 건 2016년 이후 7년 만입니다. 아예 국경을 넘어서 북상했을지 아니면 도로 남하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예요. 퓨마와 회색곰이 자웅을 다투고 흑곰과 울버린이 언더독으로 군림하는 북미의 맹수계에 새로운 강자가 뛰어든 것일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정확하게는 ‘출현’이 아닌 ‘귀환’으로 봐야 합니다. 20세기 초반까지 재규어의 서식지는 미국 중남부까지 뻗어있었거든요.
알려진대로 재규어는 고양잇과 대형맹수 6대천왕을 구성하는 쟁쟁한 파벌입니다. 구대륙(아시아·아프리카·유럽)이 사자·호랑이·표범·치타의 4대 문파 군웅할거체제라면 신대륙(남아메리카·북아메리카)은 퓨마와 재규어의 확고한 양강구도입니다. 지금은 퓨마가 험준한 로키산맥으로 대표되는 북아메리카의 대장으로 호령하고 있어요. 반면 아마존 열대우림으로 깊이 각인된 남아메리카는 재규어의 본바닥이죠. 그런데 이 재규어의 서식지가 추운 곳으로 북상할 수도 있다는 시그널이 읽히는 겁니다. 퓨마에 쫓기고 곰에 추격당하고 늑대를 피해 달아나던 생태계의 만년약자들에게는 또 다른 천적이 나타난거죠. 특히나 이 족속에게는 더욱 살떨리는 소식일 겁니다. 늪지의 제왕 악어 말이죠. 맹수들 못지 않은 사납고 흉포한 포식자 악어가 왜 겁을 먹게 되냐구요? 그건 악어가 재규어가 가장 사랑하는 반찬거리거든요. 그렇습니다. 고양잇과 맹수 6대 천왕 중에서 재규어가 유독 돋보이는 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완벽한 악어 사냥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먼저 재규어가 아마존 악어인 카이만을 사냥하는 장면(Journey with Jaguars Youtube, Nature World Facebook)을 한 번 보실까요?
크로커다일(나일악어)나 앨리게이터(미시시피악어)에 감히 필적하지 못하는 악어계의 영원한 넘버쓰리 카이만(아마존악어)이라지만, 악어는 악어입니다. 무시무시한 치악력으로 육상동물을 틀어쥐고 물속으로 끌고 들어간 뒤 혼이 빠져나가길 기다리는 사냥법으로 악명높죠. 헌데, 이 카이만은 오늘이 자신이 더 무서운 포식자에게 붙잡혀 제삿날이 될 운명일 줄 몰랐던 것 같습니다. 필살기라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할 듯한 치명적인 기술입니다. 살금 살금 움직여 공격 사정권에 들어간 뒤 전광석화처럼 악어를 덮칩니다. 즉흥적인 것 같긴 해도 이미 습격할 때부터 재규어의 머릿속에는 공격 시나리오가 그려져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동작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지 않으면 되려 되치기당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대를 이어 종족에게 전해져내려오는 필살기의 유전자가 재규어에겐 있습니다.
초반부터 악어의 목덜미를 공격합니다. 그리고 철판이라도 뚫을 기세로 쩍 벌린 뒤 송곳니를 꾹 박아넣습니다. 재규어의 이빨이 갑옷 같은 악어의 피부를 뚫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종착지를 향해 돌진합니다. 타깃은 단단한 악어의 머리뼈입니다. “빠각!” 뼈가 으깨지는 소리가 모니터를 찢고 귀청에 각인될 것 같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단 한 방의 공격이었습니다. 치명상을 입은 악어를 공격하는 것은 솜뭉치로 된 샌드백을 두드리는 것만큼 손쉽습니다. 혼비백산한 악어의 목덜미와 아래턱 등 급소를 틀어쥐고 최후의 한줌의 숨결이 빠져나갈때까지 기다립니다.악어의 혼이 달아나면서 악어핸드백용 가죽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됐어요.(참고로 카이만의 가죽은 뱃가죽이 너무 거칠어서 핸드백용으로는 썩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포유동물이나 새 같은 울음통이 없는 악어가 고통을 표현할 방법이란 그저 입을 쩍 하고 벌리는 것 뿐입니다. 먹잇감을 물고 으스러뜨리던 강력한 치악력을 자랑하던 악어의 위아래턱이 수평을 향해 힘없이 들려있습니다. 그 몸뚱아리를 입으로 틀어쥔채 재규어는 보무도 당당하게 풀숲으로 들어가 가죽을 해체하고 식사를 시작할 것입니다. 내장과 피, 혹은 숙성되고 있을 알의 노른자까지 먹어치우고 몸뚱이는 스캐빈저들과 대지에게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유순한 초식동물 뿐 아니라 포식자이자 맹수인 악어까지 즐겨 사냥한다는 면에서 재규어는 고양잇과 6대 천왕중에 단연 돋보입니다. 그리고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털가죽을 자랑하죠. 동물 다큐멘터리 애청자들 사이에서도 고차방정식으로 꼽히는게 재규어와 표범의 구별법입니다. 둘의 몸크기는 호랑이와 사자에 이은 3위권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같은 대륙을 양분하고 있는 퓨마보다는 재규어가 월등하게 크고요. 얼굴, 몸뚱이, 털가죽무늬 등 어느 하나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로 빼닮았거든요. 의외로 구분하는 기준은 어렵지 않습니다. 몸통을 두른 무늬가 단순한 원의 형태이면 표범, 그 안에 다시 점이 콕 박혀있으면 재규어입니다. 몸의 생김새도 약간 차이가 있어요. 상대적으로 전체 몸에 비해 머리의 비중이 재규어가 크고 꼬리는 짧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도 참 닮은 꼴입니다.
이렇게 사촌뻘일 것 같은 맹수들이 어떻게 해서 태평양과 대서양의 먼바다를 두고 별개의 종으로 살아가게 됐을까요? 일각의 추정은 이렇습니다. 300만년전부터 1만년전에 이르는 원시 시대(플라이스토세)에 지금 고양잇과 대형맹수의 공통적인 조상 격인 큰 들고양이가 알래스카와 시베리아를 잇는 베링해를 건너서 북아메리카에 들어간 뒤 다시 개미허리만큼 가느다란 육로를 통해 남아메리카로 퍼졌다는 것이지요. 재규어의 주 서식무대인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하는 열대우림인 동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살벌한 생존 전쟁터입니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멀쩡한(?) 동물들도 괴수처럼 극단적으로 진화했다고 하지요. 괴물 뱀의 대명사 아나콘다, 지구상 최대의 수달인 왕수달, 지구상 최대의 설치류 카피바라가 모두 아마존을 터전으로 삼습니다. 앨리게이터나 크로커다일에 비해서 확연히 왜소해진 아마존 악어 카이만이 조금 예외이고요. 워낙 커다란 덩치때문에 쉽지 않은 사냥감으로 꼽히는 카피바라를 재규어가 단숨에 사냥하는 장면(FiveZero Safaris Youtube) 잠시 보실까요?
이 과정에서 재규어는 수풀색에 맞춘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몸집은 커지고, 몸의 형태는 정글 라이프에 알맞게 적응됐을테지요. 그 결과 재규어는 그 어느 고양잇과 맹수보다도 터프한 식단을 갖게 됐습니다. 괴물 설치류 카비파라, 발굽동물인 맥(貘·테이퍼)과 멧돼지의 육촌격인 페커리와 뱀 등 재규어의 상차림에 오른 것으로 확인된 짐승의 종류만 무려 85가지입니다. 그 중 시그니처메뉴가 바로 악어 카이만이예요. 만일 카이만이 재규어를 잡아먹었다면 아마존 일보 종합1면 헤드라인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릴 정도로 둘의 포식·피식관계는 일방적입니다. 재규어의 카이만 사냥에는 이 맹수의 효율적이고 파괴적인 사냥 기술이 집약돼있어요. 끈질긴 매복(ambush) 한번의 일격이죠. 숲이 빽빽하고 곳곳에 질척거리는 늪지가 있는 아마존 정글지대에서 사자·치타 처럼 평원을 끈덕지게 달려서 먹잇감을 쓰러뜨리는 사냥법 따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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