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 장면을 보고 울었어요. 저라도 보탬이 돼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24일 오후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한 임대아파트. 지은 지 30년이 넘은 31㎡(약 9평) 크기의 아파트다. 벨을 누르자 백발의 팔순 노인이 나왔다. 허리에 복대를 찼지만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이번 호우 피해자들을 위해 써달라며 강서구청에 500만원을 기부한 김수진(85)씨다.
김씨는 지난 20일 오후 4시쯤 가양3동 주민센터에 조심스레 들어가 민원 창구에 앉은 직원 앞에 봉투 하나를 올려놨다. 그러고는 “호우 피해를 입은 분들을 위해 귀한 곳에 사용해 달라”는 말만 남기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두툼한 은행 봉투 겉면에는 굵은 사인펜으로 ‘강서구청장님 이번 수제민(수재민)을 위하여 써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봉투 안에는 5만원권 100장이 들어 있었다.
김씨는 “밤에 TV에서 폭우로 피해 입은 분들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바로 은행을 찾아가 그동안 모아둔 돈을 찾았다는 것이다. 집 안에 쌓아둔 빈 병 50여 개도 팔아 보탰다. 그렇게 마련한 돈이 딱 500만원이었다. 돈은 전부 새 지폐로 바꿨다. “귀한 데 쓸 돈이라 새 돈으로 바꿨지요” 라고 했다. 그의 집 안에 있는 달력에는 ‘7월 20일’ 밑에 ‘수제민(수재민) 도우라고 500만원 기부’라고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그는 빈 병을 모아 하루 5000원 정도를 번다. 그것도 매일 할 수는 없다. 기초생활수급비와 기초연금으로 매월 지원받는 70만원을 보태면 월 수입은 80만원 남짓이다. 생활비를 빼고 나면 매달 50만원 정도를 저축한다. 이렇게 모은 10개월 치를 이번에 한꺼번에 내놓은 것이다. 김씨는 “나한테 500만원은 정말 큰돈이지... 그래도 이렇게 쓰니 기분이 너무 좋다”며 웃었다.
김씨는 9평 아파트에서 강아지 ‘복실이’랑 둘이 산다. 부인과는 사별했고, 자녀들과 떨어져 산 지 45년이 됐다. 모두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다고 했다. 충남 공주가 고향이라는 그는 “폭우에 집이 부서지고 물에 떠내려가고 하는 걸 보면서 어릴 적 산꼭대기에 짚으로 만든 움막집에서 살던 시절이 생각났다. 부모님과 4형제가 살았지만 가난해서 형제들은 어릴 때 죽거나 친척집에 보내졌다”며 “그 시절도 비가 많이 오면 부모님께서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그러셨다”고 했다.
김씨는 집 한쪽 벽에 걸린 군복을 입은 흑백 사진과 태극기를 가리키며 “저 때만 생각하면 어깨가 펴지고 힘이 난다”고 했다. 그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고 했다. 태극기 옆으로는 헌혈 300번을 해서 받았다는 표창도 걸려 있었다. 김씨는 “예전에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너무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참 행복하다”며 기자에게 “비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절대 희망 잃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하고 당부했다.
강서구는 김씨가 기부한 돈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호우 피해 복구 지원에 사용할 예정이다. 지난 9일부터 이어진 호우로 이날까지 전국에서 47명이 숨지고 3명이 실종됐다. 이재민은 1만8863명이 발생해 2419명이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