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1조원대, SK이노베이션 7936억원, 기아 5000억원, 하나금융지주 3000억원, 우리금융지주 1364억원, HD현대인프라코어 560억원… 주요 상장 기업들이 대규모 자사주 소각 계획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기업에 주주 환원을 독려하는 ‘기업 밸류업’ 계획을 준비 중인데, 기업들이 보조를 맞춰 선제적으로 자사주 소각 방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내 2499개 상장 기업이 보유한 자사주는 63조원어치에 이른다. 기업들이 자사주를 대량 보유 중인 이유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자사주를 백기사(우호 주주)에게 매각하면 의결권이 살아나 경영권 방어 무기로 쓸 수 있다. 2003년 SK가 소버린 펀드로부터 경영권 공격을 받았을 때, 2015년 삼성물산이 엘리엇과 싸울 때 자사주를 활용해 경영권 방어에 성공한 바 있다.
기업의 자사주 소각은 주주 환원 확대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주식 물량을 줄여 기존 주주에게 주식을 배당하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사주 소각은 기업 경영권 방어력과 미래 투자 여력을 해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우려를 불식하고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에 대한 걱정 없이 자사주 소각에 적극 나설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적대적 기업 인수합병(M&A)이나 경영권 침해 시도가 있을 때, 대주주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에 신주를 발행하는 ‘포이즌 필’이나, 특정 주주의 주식에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차등의결권’, 주식 수량과 관계없이 거부권 행사 권리를 가진 ‘황금주’ 같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20% 지분으로 60% 의결권을 행사하며 경영권을 지킨다. 워런 버핏은 200배의 차등의결권으로 버크셔해서웨이의 경영권을 보호하고 있다. 171년 전통의 미국 피아노 제조 기업 스타인웨이는 2010년 한국의 삼익악기와 헤지펀드로부터 경영권 공격을 받았을 때 포이즌 필로 막아냈다. 주요국 가운데 이 같은 경영권 방어 수단이 하나도 없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기업에 경영권 방어를 위한 새 방패를 제공한다면 소액주주들에겐 기업의 전횡에 제동을 걸 ‘새 창’을 줘야 형평에 맞을 것이다. 주가 조작, 회계 분식 등 기업의 일탈에 소액주주가 대응할 수 있는 대표적 무기는 집단소송이다. 그런데 2005년 제도 도입 후 20년이 흘렀는데 지금까지 증권 집단소송은 11건에 불과하다. 제도의 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증권 집단소송은 법원에 소송 허가 신청서를 제출하고 허가를 받아야 시작할 수 있다. 기업이 이의 제기(즉시 항고)를 하면 집단소송의 대상이 되는지를 놓고 1심, 2심, 대법원까지 3차례 재판을 받아야 소 제기 여부가 결정된다. 사실상 6심제인 셈이다. 2011년 방송·통신장비업체 씨모텍의 주가조작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이 집단소송을 제기하고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기까지 9년이나 걸렸다. 집단소송의 경우 피해자가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기업이 협조를 거부하면 증거 자료 확보가 거의 불가능하다. 선진국에선 주주가 요구하면 기업이 관련 자료를 제공해야 하는 ‘증거 개시 제도’를 통해 소액주주의 집단소송을 돕는다. 우리도 소액주주에게 이런 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한국 증시 밸류업을 기대하며 외국인 투자금이 서울로 흘러들고 있다. 호기를 잘 살리려면 기업과 소액주주가 더 좋은 ‘창’과 ‘방패’를 갖도록 증시 제도도 선진화해야 한다. 자사주 소각이 더 활발해지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완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