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규슈의 벳푸(別府)는 잿빛과 붉은빛, 짙푸른 코발트색까지 색색의 증기와 점토 때문에 ‘지옥 온천’으로 불리며 사랑받는 휴양지다. 매년 5~6월이면 이 도시는 세계적인 실내악 명소로 변모한다. 올해 23회를 맞은 ‘벳푸 아르헤리치 페스티벌’이 이맘때 열리기 때문이다.
지난달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75)가 ‘피아노 여제(女帝)’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82)와 이 음악제에서 호흡을 맞췄다. 1970년대 처음 만난 이들이 같은 무대에서 함께 연주한 것도, 정경화가 벳푸 음악제에 선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이들의 연주곡은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일본 관객들의 박수가 멈추지 않자 슈베르트의 소나티나와 드뷔시의 ‘아름다운 저녁’ 등 앙코르 두 곡을 곁들였다. 연주를 마친 뒤 정경화는 “인생 버킷리스트(살면서 반드시 하고 싶은 일들) 하나를 드디어 이뤘다”며 활짝 웃었다.
벳푸 음악제의 성공에는 세 가지 비결이 있다. 우선 아르헤리치라는 세계적 스타를 영입한 뒤 축제의 간판으로 내세운 치밀한 기획력이다. 1994년 아르헤리치를 총감독으로 임명한 뒤 재단과 공연장 운영까지 모든 요소를 철저하게 아르헤리치에게 맞췄다. 2007년 그의 이름을 딴 ‘아르헤리치 예술재단’을 설립했고, 2015년에는 소공연장인 ‘아르헤리치의 집’도 개관했다. 심지어 2021년 여든 살 생일을 맞아 6월 5일을 ‘아르헤리치의 날’로 지정했다.
자연스럽게 아르헤리치의 마음도 움직였다. 평소 공연 취소가 잦은 걸로 악명 높지만 매년 일본행만은 빼놓지 않는다.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같은 거장들도 아르헤리치의 초대에 기꺼이 벳푸를 찾는다. 올해 정경화와 아르헤리치의 이중주가 성사된 배경이기도 하다.
30년 가까이 운영진이 바뀌지 않는 일관성도 축제의 안착에 한몫했다. 1994년부터 피아니스트 이토 교코(伊藤京子)가 재단 부회장으로 음악제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다. 1977년 부조니 콩쿠르 3위에 입상한 이토는 아르헤리치의 오랜 절친이다. 1994년 축제 출범 당시 기자회견에서 아르헤리치는 벳푸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교코가 있기 때문”이라고 딱 한마디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음악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과감한 투자다. 1998년부터 어린이를 위한 무료 음악회인 ‘피노키오 콘서트’를 꾸준하게 열어서 누적 관객만 4만6000여 명(136회)에 이른다. 이토 부회장은 “만남의 장(meeting point)이라는 축제 명칭처럼 성인과 어린이, 전문 연주자와 관객이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축제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