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김성규

1990년대만 해도 아파트를 지을 때 건설사나 지역의 이름을 붙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서울 유명 재건축 단지인 강남구 ‘압구정 현대아파트’나 송파구 ‘잠실주공 5단지’, 마포구 ‘성산 시영’ 등이 대표적이다. ‘은마아파트(한보건설)’, ‘개나리아파트(삼호주택)’처럼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이를 전문적인 브랜드 마케팅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아파트 브랜드가 청약 흥행 성공 여부를 가르고, 매매·전세 시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비슷한 입지라도 어떤 브랜드냐에 따라 집값이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 차이가 벌어지고, 초등학생조차 자신이 사는 집을 아파트 브랜드로 표현할 정도가 됐다. 아파트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의 태도 변화를 알아챈 건설업계에선 바야흐로 ‘브랜드 전성시대’가 열렸다.

◇아파트 브랜드 가치에 사활을 건다

이제 주거 상품을 공급하는 건설사는 브랜드 마케팅에 사활을 걸고, 모든 기술력을 동원해 브랜드 가치를 올리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2000년 ‘e편한세상’을 출시한 DL이앤씨는 지난해 2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브랜드 개편 작업을 했고, 올해 4월 전용 전시관 ‘드림하우스 갤러리’를 열고 고객 접점 확대에 나섰다. 삼성물산도 2000년 ‘자부심’이라는 브랜드 철학을 강조하며 ‘래미안’을 선보였고, 2002년 ‘자이’를 출시한 GS건설은 일관되게 고급화 전략을 구사하며 차별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롯데건설은 2019년 대표 브랜드 ‘롯데캐슬’을 개편하며 기존의 클래식한 이미지에 젊고 세련된 느낌을 더했고, 대우건설도 ‘푸르지오’ 브랜드를 전면 개편했다. 포스코건설은 최근 서울 강남에 ‘더샵 갤러리’를 열고 앞선 건축 기술을 홍보하고 있다. 부영 ‘사랑으로’는 임대주택 공급을 통한 서민 주거안정에 기여한 것을 넘어 분양 아파트 시장에도 안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화건설 ‘포레나’, 금호건설 ‘어울림’, 금성백조 ‘예미지’, 우미건설 ‘우미린’, 한양 ‘수자인’, 아이에스동서 ‘에일린의 뜰’ 등 다른 건설사들도 각자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질 좋은 아파트를 공급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국민 93.5% “브랜드가 아파트값에 영향”

대한민국 국민의 주거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통계청 집계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전국 2034만 가구 중 아파트에 거주하는 비중은 51.1%(1041만 가구)에 이른다. 한국의 대표 주거 상품이 아파트라는 데 이견을 내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주택을 재산 보존 또는 증식의 수단으로 보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브랜드는 아파트의 가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된다. 부동산R114가 지난해 11월 국민 433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건설사 및 브랜드가 아파트 가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라고 응답하는 사람의 비중은 2015년 85.6%에서 지난해 93.5%로 높아졌다. 부동산 정보업체 닥터아파트가 회원 221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아파트 구입의 최우선 고려 요소로 브랜드(40.7%)가 꼽혔다.

실제 부동산 시장에서도 아파트 브랜드는 수요자들의 의사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동산R114 집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9월까지 전국에서 분양한 아파트 중 1순위 청약자 수가 가장 많았던 상위 30곳 중 10대 건설사 브랜드 단지가 19곳으로 63%에 달했다.

◇소비자 눈높이 맞춰 진화하는 아파트

브랜드 아파트가 대세로 자리를 잡은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노태우 정부가 추진했던 1기 신도시 등 전국 200만호 공급 정책에 따라 단기간에 아파트가 급속도로 늘어났고, 1998년 분양가 자율화가 시작되면서 건설사들이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고급화 전략으로 브랜드를 내놓은 게 시발점이었다. 래미안, 자이, e편한세상, 롯데캐슬 등 지금의 유명 브랜드들이 대부분 그때 만들어졌다.

최근 전국 주요 도시 핵심 입지에서 재건축·재개발을 통해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국민 눈높이가 한층 높아졌다. 그러자 재건축·재개발 수주를 위해 별도의 프리미엄 브랜드를 만드는 건설사도 늘어나고 있다.

대우건설은 기존 ‘푸르지오’에 정상, 꼭대기란 의미의 ‘써밋(SUMMIT)’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프리미엄 브랜드를 내놨다. 서초, 반포, 과천 등에서 공급된 푸르지오써밋 아파트들은 대부분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단지가 됐다. 롯데건설은 한정판을 뜻하는 ‘리미티드 에디션(Limited Edition)’의 약자인 ‘LE’와 시그니엘, 애비뉴엘 등 롯데그룹의 상징으로 쓰는 접미사 ‘EL’을 합쳐 ‘르엘(LE-EL)’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고 현대건설도 ‘디에이치(THE H)’라는 프리미엄 브랜드를 2015년부터 사용하고 있다. DL이앤씨는 기존 주상복합 브랜드였던 ‘아크로(ACRO)’를 최근 고급 아파트에 적용하고 있다. 2015년 분양한 서초구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는 국내에서 평(3.3㎡)당 가격이 가장 비싼 고급 아파트로 자리매김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아파트 브랜드 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분양가를 부풀린다는 지적도 있지만, 산업의 혁신을 부추기는 긍정적 측면이 더 크다”며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한 경쟁은 국민 주거 수준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