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설원과 새파란 하늘, 은빛 상고대를 입은 나무들. 겨울 선자령이 이렇게 고분고분 순한 날도 드물 것이다. 한 달 전 올랐더니만 각오했던 칼바람은 숨을 죽였고 기온도 매몰차게 낮지는 않다. 초보 등산객에겐 고마운 날씨다. 네댓 살 아이가 뛰어가다 아빠 스틱을 붙잡고서 미끄럼을 타며 간다. 산악자전거를 타는 이들도 있다. 완만한 서쪽 구릉, 가파른 동쪽 비탈 사이로 난 능선 길을 걷자면 강릉 시가지와 검푸른 동해가 한눈에 든다.

▶강원도 평창 선자령은 대관령 북쪽 백두대간에 서서 영동과 영서를 가른다. 정상이 1157m에 이르지만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에서 시작하는 들머리가 840m여서 300m쯤만 오르면 된다. 능선 따라 올라갔다가 서쪽 골짜기로 내려오는 왕복 길이 10.8㎞. 워낙 평탄해서 해찰하며 가도 네 시간이면 충분하다. 선자령은 오른다기보다 걷는다고 하는 게 맞다.

▶선자령은 야생화 천국이다. 봄이면 바람꽃·복수초·얼레지·중의무릇이, 여름엔 애기앉은부채·산비장이·제비동자꽃·각시취가 다투어 핀다. 선자령은 겨울에 제일 붐빈다. 황홀한 눈꽃을 쉽게 즐길 수 있어서다. 설원에 키 80m 풍력발전기 쉰 몇대가 돌아가는 것도 이국적이다. 선자령이 가장 큰 풍력발전단지라는 건 그만큼 바람이 드세다는 뜻이다. 연평균 초속 6.7m의 바람이 불고 겨울엔 걸핏하면 초속 20m를 넘긴다. 초속 15m면 간판이 날아가고 20m를 넘으면 기왓장과 지붕이 뜯긴다.

▶선자령 바람은 뺨을 후려갈기듯 모질어서 '따귀바람'이라고 부른다. 바람이 초속 1m씩 빨라질 때마다 체감온도는 0.6도씩 떨어진다. 그제 낮 두 시쯤 선자령 정상 부근에서 칠순 부부가 저체온증으로 탈진해 숨졌다. 기온은 영하 2도였지만 순간 최대 풍속 20.6m 강풍이 몰아쳤다.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갔고 앞사람이 안 보이도록 눈보라가 일었다. 두 주 전에도 선자령에서 40대 남자가 심장마비로 숨졌다.

▶체온이 34도로 떨어지면 근육이 딱딱해지고 31도에선 의식을 잃는다. 고혈압·당뇨병 같은 혈관 질환이 있는 사람은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덕유산 정상 향적봉도 곤돌라 타고 편하게 오르는 눈꽃 명소다. 향적봉에서 중봉 가는 짤막한 길에 '작년 겨울 등산객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곳'이라는 경고문이 둘이나 서 있다. 선녀가 아들을 데리고 와 놀았다는 선자령(仙子嶺)이지만 겨울 산은 그렇게 평화롭지만은 않다. 잘 차비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올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