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 8일 김정은의 여덟 살 생일잔치가 원산초대소에서 열렸다. 김정은은 검정 양복에 나비 넥타이를 맸다. 식탁에는 훗날 김정은 찬양 노래가 된 '발걸음'의 악보가 놓여 있었다. 북한에서 으뜸가는 대중악단 보천보전자악단은 '발걸음'을 만들어 이날 처음 선보였다. 우리로 치면 '소녀시대급' 톱스타가 대통령 아들 생일잔치에 불려가 축하 노래를 바친 격이다. 보천보전자악단은 왕재산경음악단과 함께 김정일 시대를 대표하는 악단이다. 딱딱했던 군가(軍歌)풍 '주체 음악'과 달리 전자 기타와 신시사이저 같은 팝 요소를 가미했다.

▶두 악단의 공연은 철저히 김정일을 위한 것이었다. 김정일이 먼저 즐기고 나서 가끔 주민들에게 선심 쓰듯 공개하곤 했다. 2009년엔 '기쁨조'로 알려진 무희(舞姬)들의 스트립쇼를 연상케 하는 공연 장면이 담긴 CD가 '기쁨조의 실체'라며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다. 이들이 바로 왕재산악단 소속이었다.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은 간부들에게 기쁨조와 함께 춤을 추라고 권했지만 단원들 몸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2010년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내정되면서 예술단도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새로 떠오른 것이 은하수관현악단과 모란봉악단이다. 장르로 따지면 은하수는 클래식, 모란봉은 대중음악 쪽이다. 얼마 전 미키마우스와 미국 영화 '록키'의 주제가, 미니스커트 차림의 북한판 '걸 그룹'이 등장했던 공연이 모란봉악단 작품이다. 은하수관현악단은 젊은 연주자가 많고 연주 실력도 북한 정상급이라고 한다. 김정일은 생전에 생일이나 당 창건기념일이면 아들을 데리고 은하수악단의 공연을 보러 갔다.

▶북한이 엊그제 김정은의 부인 이름이 리설주라고 처음 공개했다. 정보 당국은 리설주가 작년까지 은하수관현악단에서 활동했던 가수와 같은 인물인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은의 생모는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출신 고영희였다. 김정일 부자(父子)는 예술인을 배우자로 삼는 전통 하나를 잇게 됐다.

▶김일성은 미래의 며느리가 무용수로 활동했던 만수대예술단을 좋아했다. 김정일은 장차 며느리 될 가수가 활약한 은하수악단을 아꼈다. 김정일은 생전에 "은하수악단의 창조 기풍은 모든 예술단체가 따라 배울 본보기"라며 은하수악단 전용 극장까지 만들어줬다. 김정일과 김정은이 '예술'을 즐기다 우연히 그 여인들을 사랑하게 됐는지, 아니면 아버지가 며느리로 점찍은 여인들과 결혼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김씨 부자가 정말 사랑한 것이 예술이었는지, 그 예술을 하는 여인들이었는지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