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조선일보를 정상으로 이끈 방우영 대표

"극장 일을 맡아보라." 1952년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며 편집국장을 꿈꿨던 방우영(方又榮)은 친형이자 조선일보 대표였던 방일영(方一榮)의 이 한 마디에 8년 기자 생활을 접었다. 1960년 말 경영난에 시달리던 방계회사 아카데미극장의 경영을 정상화하라는 명이었다. 아쉬움을 달랠 겸 편집국장 송지영(宋志英)에게 "어차피 기자 그만두는 마당에 차장(次長) 발령이라도 내주실 수 없겠습니까?"라고 부탁하자 송 국장은 "글쎄 생각해보지"라고 답했다. 결국 방우영은 조선일보를 떠날 때까지 평기자였다.

편집국장의 꿈을 접고 아카데미극장 대표로 있던 방우영은 2년이 채 안된 1962년 10월 조선일보 상무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1964년 11월 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형 방일영 대신에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경영을 맡은 방우영 대표의 새로운 꿈은 '정상(頂上) 조선일보'였다.

첫 시동은 편집의 변화에서 시작됐다. 취임 2개월 후인 1965년 1월 방우영은 편집 전문가인 김경환(金庚煥)을 편집국장으로 임명했다. "조선일보라는 제호만 빼고 우리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신문을 만들어 봅시다." 기자 생활을 통해 신문에서 편집이 차지하는 비중을 꿰뚫고 있었던 방우영은 이후 '편집이 좋은 신문, 조선일보'를 만드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잘한다는 편집자는 몽땅 데려와. 조선일보 한번 말아먹어 보라우."

성과는 곧 나타났다. 유려한 제목과 편집이 다른 신문들을 압도하며 조선일보 구독자 수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1965년 3월 17만4500부이던 유가부수는 11월에 20만2077부를 기록하며 20만부를 돌파한다. 그리고 1968년 말이 되면서 경쟁지와 비슷한 수준에 육박하게 된다.

1970년 조선일보 창간 50주년의 해에 방우영 대표는 신년사를 통해 "대조선(大朝鮮)의 일원으로 긍지를 가지고 반백년(半百年)의 생일을 맞는 영광을 다 함께 누리자"고 강조했다. '1등 조선일보' '정상 조선일보'를 향한 대장정의 선언이었다. 사옥을 새로 짓고 최신형 윤전기를 도입하는 등 하드웨어를 혁신하는 한편 기자들의 세대교체, 대대적인 지면쇄신, 다채로운 문화사업 등을 통해 소프트웨어도 강화했다. 혁신의 결과는 폭발적인 독자증가로 나타났다. 조선일보는 1972년 3월 5일 52주년 기념호를 통해 독자가 50만명을 넘어섰다고 공식 선언했다.

1973년 방우영은 신년사를 통해 "1975년까지 한국신문계의 정상을 차지한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구체적 방향을 제시했다. "유신체제로 인해 정치면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경제·문화·국제 뉴스를 강화하고 기획물을 대거 발굴해 개성적인 지면을 제작하자." 당시의 억압적 정치상황으로 조선일보도 다른 회사들처럼 내홍을 겪기도 했지만 성장은 지속돼 1973년 12월 발행부수가 56만부를 기록했다. 정상이 보이고 있었다.

조선일보는 드디어 1974년 광복 후 처음으로 정상을 탈환했다. 1974년 2월 미국 ASI라는 광고 및 매체연구 분석기관이 한국 신문 구독에 대한 면접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정기구독자 비율은 조선일보(조간) 28.7%, A지(석간) 24.4%, B지(석간) 21.8%, C지(조간) 13.2%였다. 방우영 대표 취임 10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