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구역개편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개편안은 다소 차이는 있으나 시·군·구를 통합하여 인구 60만~100만 규모의 광역시 70개 내외를 설치하고 광역시·도(道)를 폐지하여 2단계인 자치계층을 1단계로 줄이자는 것이다. 지방행정체제는 3단계에서 2단계가 된다.
현 지방행정구역은 110여 년 전 전화도 없고 달구지를 타고 다니던 농경시대에 획정된 것으로서 교통·통신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 디지털시대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정구역개편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양당이 제시한 '70개 광역시 1계층제'안은 행정구역개편의 기본이념인 민주성, '근접성의 민주주의'에 역행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중앙집권적 정치문화를 간과하고 있다.
먼저, 기초자치단체인 시·군·구의 평균 인구규모(20만9942명)는 통합을 해야 할 만큼 작지 않다. 영국의 1.6배, 일본의 2.9배이며, 미국·독일·이탈리아·스페인의 24~37배, 프랑스의 120배나 된다. 이런 시·군·구를 더 광역화하면 효율성 요구에는 부합하겠지만 주민 가까이에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근접성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주민의 생활과 복리를 직접 챙겨야 할 책무는 기초자치단체에 있다. 군(郡)의 면적이 서울시보다 넓은 곳이 많은데, 인구가 적다고 그런 지자체들을 인구 70만으로 통폐합하려면 10개 군을 합쳐도 모자랄 수 있다. 그 광활한 구역에서 어떻게 민생(民生)과 복지행정을 펼칠 수 있겠는가? 선진국에는 1000명 미만의 기초자치단체들이 많아 통폐합이 필요하지만, 중앙정부가 획일적으로 통폐합하려 하지 않는다. 영국은 2009년 4월 33개 디스트릭트(District)가 폐지되지만 주민의 자율에 의한 것이다.
다음으로, 70개 광역시로 1계층화하면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의 의존도가 높아질 것이다. 중앙집권의 뿌리가 매우 깊은 우리나라에서 시·도에 대한 분권조차 기피해온 중앙정부가 그보다 구역이 좁은 광역시 1계층으로 개편한다면 분권화는 더 어려워지고 중앙집권화로 치달을 것이다. 더구나 정치권의 개편안은 도를 폐지하는 대신 중앙정부 산하에 지방광역행정청을 신설하여 여기에 중앙의 특별지방행정기관이 관장하던 기능과 도가 담당하던 광역적 기능을 모두 맡긴다는 것이므로 중앙집권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특별지방행정기관이 하는 일을 지방자치단체에 이양하고 지방자치단체에 통폐합하겠다던 정부의 공약과 지방분권정책은 공염불이 되고 말 것이다.
인구를 획일적 기준으로 하여 탁상에서 짜맞추기식 행정구역개편을 할 위험성도 예견된다.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군민의 정서와 경제적, 사회·문화적 특성, 지리적 여건 등을 무시한 개편이 추진되어, 지역주민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칠 것이다. 여수시가 행정구역 확대로 경쟁력이 제고되어 전남 22개 시·군 중 수위권(首位圈) 도시로 성장했다면서 시·군 통합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나, 3여(麗·여수시 여천시 여천군)는 원래 여수군에서 분할된 시·군으로서 이들의 통합은 한 뿌리로 되돌아간 것이지 정치권이 제안하는 뿌리가 다른 시·군 간의 통합과 성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10년째 '통합청사' 논란이 이는 등 통합 전 연고지 중심의 '소지역주의'가 아직도 남아 있다.
뿌리가 다른 기초자치단체들을 일정한 인구기준으로 획일적으로 묶겠다는 것은 무모한 발상이다. 서울·부산·인천을 분할하는 것도 시대에 역행한다. 뉴욕·도쿄·싱가포르·홍콩·상하이·베이징 등 대도시들과 경쟁할 수 없게 된다. 지금은 대도시들 간의 경쟁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