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전 뉴욕에 머무를 때 한 세미나에 참석한 일이 있다. 편집할 때 사용하는 매킨토시 프로그램 세미나였다. 기능이 업그레이드 된 새 버전이 나올 때마다 열리는 이 세미나에는 한국에서도 몇 번 참석했었다. 그런데, 별다를 바 없으리라 생각했던 세미나에서 한 마디로 충격을 받았다. 놀랍게 향상된 프로그램 기능 때문이 아니다.

한국에서라면 40대는 고사하고 2~30대가 전부일 세미나에 참석한 뉴요커들의 면면 때문이다. 머리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내 옆에 앉았다. 저 앞에 할아버지도 보이니 이 할머니만 유별난 것도 아니다. 마흔을 훌쩍 넘긴 사람도 많다. 난 그때까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쿨하게 아름다운 매킨토시 앞에서 영상편집을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갈 때 보니 할머니는 몸이 불편해 계단을 제대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간신히 한 발 한 발을 옮긴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브로드웨이와 월 스트리트가 교차하는 거리의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뉴요커, 뉴요커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뜨겁게 맴돌았다. 부럽고 샘이 났다.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똘똘 뭉쳐있는 도시, 뉴욕을 난 그때 처음 발견했다.

뉴욕 취재를 준비하며 뉴욕에 관한 책과 온갖 자료를 뒤졌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뉴욕은 대개 쇼핑과 섹스앤더시티, 자유와 예술의 도시라는 막연한 수사였다. 모든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 한 번쯤 뉴욕을 여행하고 싶다고 말하고 이유도 한결같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뉴욕이 과연 진짜 뉴욕일까. 어쩌면 우리가 뉴욕에 가고 싶은 이유는 ‘섹스앤더시티’ 같은 미디어가 만든 게 아닐까. 그런데 미디어에 비치는 뉴욕은 뉴욕의 작은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는 뉴욕은 뉴욕의 껍데기일 뿐인지도 모른다.

내가 만난 뉴요커는 대부분이 뉴욕 출신이 아니었다. 미국의 다른 지역 출신만큼 외국인도 많다. 뉴욕에 사는 사람들의 국적은 85개에 이른다. 뉴욕을 상징하는 옐로우 캡 기사가 사용하는 언어는 60여개다. 택시 드라이버건 아티스트건 펀드 매니저건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떠나 제각각의 꿈을 가지고 뉴욕으로 가겠다고 결단 내린 사람들이다. 상대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뉴욕의 공기가 이들을 부추긴 탓도 있을 것이다.

뉴욕의 회사는 직원을 뽑을 때 5년 이상 경력자를 선호한다. 대학을 나왔는지, 고등학교를 나왔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인터뷰만으로 그가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간단히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민자에게도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관대하다. 물론 미국 전체가 아니라 뉴욕 얘기다. 이민국은 미국이지만 뉴욕은 미국이 아니다.

사실 이민국을 통과만 하면 불법이건 합법이건 뉴욕에서 사는 일은 아주 쉽다.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계산원으로서 열 두 시간을 일하면 누구나 100불의 돈을 받는다. 열두 시간을 서 있는 일이 쉽겠는가. 하지만 낯선 도시 뉴욕에서 일하고 사는 게 쉽지 않아도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분투하는 사람이 뉴요커다.

뉴요커는 온전히 제 의지로 삶을 선택해 뜨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뉴요커는 백인만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뉴욕에서 태어난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국적과 인종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뉴요커를 규정하는 키워드는 의지와 선택, 열정이다. 이들의 열기가 도시의 에너지를 뜨겁게 달군다.

얼마 전에 서울대 연고대 출신 80여명이 우리은행 창구직에 지원했다는 신문기사를 봤다. 그중에는 석박사도 있다고 한다. 창구직은 고졸 여성이 주로 해온 일인데 서울대 출신이 응시했다는 게 관심을 끌었나 보다.

그런데 서울대를 나와 은행 창구 직원으로 일하면 안 되는 걸까.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는 게 꿈인 것처럼 어떤 사람은 구멍가게를 갖는 게 꿈일 수도 있다. 우리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꿈마저 서열화한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일은 쉬울까.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자기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대로 살면 되지 않나. 그게 행복 아닐까.

뉴욕에서는 모두가 제멋대로 살아간다. 뉴요커는 남들처럼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없다.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기막힌 대답도 많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산다는 게 무책임하게 산다는 말은 아니다. 내 멋대로 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는지도 모른다. 정말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한 번이라도 내 멋대로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내 멋대로 살되 멋있게 사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다. 시늉도 어렵다. 그러나 내 멋대로 살기에 자기만의 길을 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스물에는, 서른에는, 마흔에는 어때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삶에 대해 유연해지면 나이에 상관없이 살 수 있다. 젊다는 것, 성숙하다는 것은 모두 유연하다. 내가 뉴욕에서 만난 뉴요커들이 그랬다. 뉴요커에게 열심히 산다는 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뿐이다. 뉴요커는 자기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뉴욕에서 만난 친구 말이 떠오른다. “잘산다는 건 우리 가족 중 영화감독은 한 사람도 없지만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사회가 뭐라고 하건 부모가 뭐라고 하건 난 온전히 내 삶을 선택한 거야. 선택하면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며 살겠다고 결정하는 건 당장 죽을지 살지를 결정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우리는 그걸 왜 그렇게 어려워하지?”

뉴요커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는 사람들이다. 뉴요커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걷는다. 우리는 하.고.싶.다. 라고 생각만 하는 건 아닌가? 내가 생각하는 뉴요커는 남녀노소 나이에 상관없이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스무 살보다도 빛나는 중장년의 청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