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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막걸리 버리고 세계로!"…高大는 '혁명'중
김덕한 주간조선 기자 ducky@chosun.com
입력 : 2004.11.20 09:31 40' / 수정 : 2004.11.20 13:21 42'

고려대는 지금 ‘혁명’ 중이다. 국내 대학 중에서 영어 상용화를 가장 먼저 선언했고, 일반교과목 강의의 상당수를 영어로만 한다. 외국인을 정식 교수로 임용했으며 심지어 국어국문과 교수를 외국인 중에서 채용할 방침이다. 외국어문학 전공학생들은 의무적으로 한 학기 학점을 해당 언어국 대학에서 따야 하고, 한 학년 학생의 20%인 1000명을 외국에 보낼 수 있도록 외국 대학들과 협정을 체결했다.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지하를 3층까지 파내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만들었다. 사실상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것을 다 갈아치우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혁명’이 다른 곳도 아닌 지금껏 가장 보수적인, 심하게 말해 가장 고루한 이미지로 각인된 고려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서 국내·외의 놀랍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변화의 속도 역시 놀라운 것이다. 국제화를 추구하는 ‘글로벌 KU(Korea University·고려대)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은 작년 2월 20일 어윤대(魚允大) 총장이 취임한 이후부터.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았다. 어윤대 총장은 취임사에서 ‘세계의 대학’으로 탈바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과학 고대’를 주창했다. 얼핏 지극히 당연하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 제안은 그러나 파격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요강을 동반하고 있었다.


우선 영어의 공용화를 제창하면서 많은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고 제도와 조직, 운영시스템 등도 환골탈태시켜 빠른 시일 내에 세계 100대 대학에 진입하겠다고 말했다. 자연과학 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라는 것도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바탕으로 성장해온 고려대의 역사를 살펴볼 때 실현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법대 4학년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당시에는 늘 하는 얘기 정도로 생각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2년도 안된 지금 어 총장의 약속은 실현되고 있다.

고통이 수반되는 개혁도 과감하게 진행됐다. 이공계와 의대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의대 교수들에게는 매년 논문 두 편 이상을 발표하지 않으면 직급 승진을 시키지 않는 강제규정을 뒀다. 세계 100대 대학 진입을 위해서는 가장 많은 예산을 사용하면서도 대학 순위 산정에서 기여는커녕 부담이 되고 있는 의대 혁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교직원들에게도 목표를 정하고 진행상황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어 체크하는 기업식 문화를 도입했다. 한 교직원은 “어 총장 취임 이후 업무량과 부담감이 몇 배로 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개혁에는 반발과 저항이 있게 마련이다. 어윤대 총장 취임 이전 재단의 총장 선임 방식에서 야기된 문제로 한때 ‘두 명의 총장’ 사태까지 가져왔던 고려대의 강력한 교수 사회는 그러나 아무말 없이 인내했다. 고려대 대외협력처 박형규 홍보팀장은 “여러가지 참기 어려운 일도 많았겠지만 개혁 초기부터 전체 고려대 가족들 사이에서는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면서 “이 분위기는 개혁에 대한 강력한 견제 장치가 되는 한편, 견인차 역할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즉 분명하고 훌륭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폭발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고려대 개혁의 속도와 추진력을 높였다는 것이다.

각계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고려대 출신 졸업생들의 개혁에 대한 열망도 고려대 변혁에 큰 역할을 했다. 한 졸업생은 “1960년 4·18을 통해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는 등 우리 사회와 대학문화를 주도했던 고려대는 1980년대 이후부터는 미래형·개혁형·선도형 역할을 경쟁대학에 계속 빼앗겨 왔다는 답답함과 울분을 늘 가지고 있었다”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자 모든 고대인의 잠재해 있던 힘이 분출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지난 5월 고려대 인촌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크림슨 마스터즈 콘서트'
잠재됐던 변화 열망 분출

고려대가 잡은 변화의 방향은 적절한 것이었다. ‘우직한 리더십’을 넘어 외국어에 능통한 국제형 인재를 만들어야 한다는 교우들의 견해가 제대로 반영됐기 때문이다. 고려대 100주년을 맞아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글로벌 KU 프로젝트’가 맞아떨어져 폭발적인 결집력을 낳았다는 것이다.

시설을 개선하고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고려대의 교육 환경의 혁명적 개선은 다른 대학들의 벤치 마킹 대상이 될 만큼 성공적이다. 이화여대 등 몇 개 대학이 지하주차장 사업을 착수해 고려대는 ‘대학가 땅파기 열풍’의 진원지가 되고 있고, 작년 8월 최첨단 교육시설인 ‘LG-포스코 경영관’에는 다른 대학 관계자들의 견학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이 돈은 다 어디서 났을까. 물론 100억원씩 목돈을 쾌척한 대기업의 기부금도 큰 힘이 됐지만 글로벌 KU 프로젝트를 위해 필요하다고 잡은 목표 기금 2200억원은 국내외의 교우들에게서 상당부분 채워지고 있다. 목표를 넉넉히 추가달성할 것을 자신하고 있을 정도다.

지난 8월 28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해외석탑제는 졸업생들의 뜨거운 호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사였다. 하와이에 사는 77세의 졸업생을 비롯해 15개의 해외 지부에서 500여명의 졸업생이 몰려들었고, 고려대 발전상을 담은 영화를 보고 교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졸업생도 많았다고 한다.

급속한 변화는 역설적으로 변화 이전 고려대의 정체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외국에 나가 있는 학생 수 등 ‘국제화 지수’에서 고려대는 작년 3월까지 학교 관계자가 “실상을 조사해보고 스스로가 참담해질 만큼 부끄러운 수준이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뒤처진 지표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20~30년이 걸려도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기존의 발상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교무회의에서는 목표 달성을 위한 갖가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우선 외국으로 보내는 학생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해 고려대 캠퍼스를 전세계에 두자는 ‘글로벌 캠퍼스’ 계획이었다. 즉 외국대학에 학생 한 명을 보내고 외국대학에서 한 명을 받는 기존의 투웨이(Two-way) 방식 교류협정으로는 뒤처진 국제화 지수를 따라잡기 어려우니 외국에서 오는 학생 수와 관계없이 고려대 측에서 학생을 일방적으로 보내는 원웨이(One-way) 방식의 교류협정을 맺자는 안(案)이었다. 외국으로 나가려는 학생은 많지만 그쪽에서 한국으로 오려는 학생 수가 적어 교류프로그램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것은 대학들의 오랜 고민거리였다. 그러나 원웨이 방식의 교류는 경비 문제 등 난점이 많아 선뜻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방안이었다.

UC데이비스 학비 65% 깎아

고려대의 경우에도 목표인원 1000명을 받아줄 만큼 외국대학들과 협정을 맺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 우선 문제였고, 맺는다 하더라도 한국에 비해 훨씬 비싼 선진국의 학비와 학생들의 안전보장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학비를 깎지 못하고 맺은 협정은 사실상 휴지조각이 될 가능성이 높았고 기숙사 등 안전하게 머물 곳도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영어권 대학들을 대상으로 접촉에 들어갔다. 첫 번째 결실은 호주 그리피스대(Griffith University)에서 이뤄졌다. 대학이 있는 지역 이외에서 거주하는 학생, 특히 외국 학생들에게는 비싼 학비를 받는 호주 대학의 특성상 외국인에게 학비를 깎아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기숙사 역시 호주 학생들도 줄 서서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협상을 시작한 지 석 달도 안되는 작년 9월 고려대생을 최대 100명까지 파견할 수 있는 협정에 서명했다. 학비의 40%를 깎아주고 학생들을 0순위로 기숙사에 넣어주고 의료보험료까지 그리피스대가 부담하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2001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와 협정을 체결하면서 협상 시작 후 3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속전속결이었다.

지난 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데이비스(UC Davis)와 체결한 협정에서는 학비를 65%나 깎았다. 그 도시에서 버스를 마음대로 탈 수 있는 티켓 혹은 자전거를 미국 대학이 제공해준다는 조건까지 붙였다.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는 미국인 학생들과 같은 비용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학교 역시 다른 주립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인의 세금을 한국 학생들을 위해 쓸 수 없다는 점 등을 들며 난색을 표했고 사실상 협상이 결렬되는 단계에까지 갔다. 그러나 2003년 5월부터 미국 국제교육자협회(NAFSA) 컨퍼런스 등에서 만나 공을 들였던 그 대학 고위 관계자의 도움으로 죽었던 협상이 살아났다. 그 대학 내 다른 교류프로그램을 응용해 돌파구를 찾는 방안을 연구해 낸 것이다. 특히 고려대가 학생들로부터 받는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돌려줘 외국에 나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에 그 학교 관계자들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이다.

난관을 뚫어나가면서 협정에는 속도가 붙었다. 영어권 외에도 중국의 인민대, 베이징대 등과 협정이 완료단계에 있는 등 49개국 400개 대학과 교류 협정이 체결됐다. 1970년대부터 2002년까지 맺어진 총 협정이 112개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속도를 확인할 수 있다. 2002년 말부터 운영하고 있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안의 고려대 기숙사 이외에 영국 런던대, 중국 인민대 캠퍼스에도 고려대생 전용 기숙사를 건립하고 있다.

언제까지 일방적으로 학생을 보내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어 강의를 늘리고 학생들의 국제화지수를 높이는 것은 글로벌 대학을 만들어 외국인들과 교류하는 데 제한이 없는 인프라를 만들겠다는 전략과 상통한다. 외국인 교수와 학생들을 위한 호텔식 시설의 기숙사 ‘I-House’도 내년 1월 완공할 예정이다. 외국인이 한국으로 올 때 가장 선호하는 대학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당장 지난 여름 미국 아이비리그(Ivy league)의 명문대학을 포함한 유명 교수들을 초빙해 지난 6월 말부터 한 달 남짓 진행한 ‘고려대 하계 캠퍼스(summer school)’ 프로그램도 성황리에 끝났다. 긴 여름방학 동안 소속 대학에서 급여를 받지 못하는 외국 대학 교수를 이 기간에 초빙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영어 강의를 들으며 한국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껴 동·서양 300여명이 참여했다. 국제하계대학을 집행한 염재호 국제교육원장은 “국제 하계대학을 획기적으로 확대해 글로벌 고려대를 세계에 알리는 기회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 같은 성과는 고려대가 교육인적자원부가 선정하는 특성화 우수대학 지원사업 대상 학교로 2003년부터 올해까지 2년 연속 선정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세계적 경제평론가인 일본의 오마에 겐이치가 고려대의 글로벌 KU 프로젝트를 견학한 후, 이 사례를 일본 의회에 보고해 각성의 기회로 삼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등 국내외의 긍정적 반응이 이어진다.

그러나 시작은 지금부터다. 사실 고려대는 최근 급격한 혁신의 모습을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개혁의 고통도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이공계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일부 통계에서는 논문 발표 지수 등에서는 투자한 만큼 변화의 속도가 뒤따라 주지않는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오랜 역사의 무게가 변화의 짐이 되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고려대의 혁신 노력을 한국은 물론, 세계의 대학 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아시아·세계 생각하는 대학 됐으면…”

◆“명문을 버려라” “조국을 등져라”파격 홍보… 이두희 대외협력처장

고려대발 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기존 이미지를 혁파하는 창의적 아이디어다. ‘명문을 버려라’ ‘조국을 등져라’라고 외치는 광고, 영어 문구가 쓰인 글로벌 심벌, ‘막걸리’가 아닌 ‘와인’ 기념품, 주한 외교관들과 고려대에 발전기금을 내준 사람들을 부부동반으로 초청해 매년 개최하는 ‘크림슨 마스터즈 콘서트’ 등이 그것이다. 이같은 아이디어 뒤에는 이두희(李斗熙) 대외협력처장이 있었다.

이 처장은 작년 3월 취임 이후 지금까지 100일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다고 한다. 학생들을 외국에 보내기 위해 외국 대학관계자들과 협상을 벌이며 학비를 깎고 기숙사를 확보했다.

- 작년부터 외국 대학들과 맺은 교류협정에는 파격적인 조건이 많다. 어떻게 가능했나.

“대학도 기존의 틀을 탈피해 기업적인 협상 능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호주 그리피스대학 같은 경우는 한국의 명문 대학이 기존의 통상적인 학생교류가 아니라 학생의 일방적인 방문 프로그램을 하려 하는데 시장의 원리로 봐서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의 높은 학비로 호주에 유학올 수 없다는 점을 인식시키고 타대학과 서로 경쟁하도록 한 것이 주효했다.”

- 엄청난 이미지 변화를 꾀하고 있는데 저항은 없었나.

“왜 ‘민족고대’의 이미지를 버리려 하느냐, 왜 와인병에다가 학교 이름을 써서 쓰레기통에 들어가게 하느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고루한 틀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환골탈태하자는 데 졸업생을 포함한 전체 교우들의 지지가 많았다. 그렇지만 만약 기념품 와인이나 만들고 진짜 내용있는 변화를 하지 않았다면 강한 저항에 부딪혔을 것이다.”

- 광고비에 너무 많은 돈을 쓰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대학이 이처럼 대규모 광고를 하는 것 자체에서 협상력이 발생했고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많아 밝히면 놀랄만큼 적은 비용이 들었다.”

- 앞으로 남은 계획은.

“고려대가 글로벌 시대에 한국에서가 아닌 아시아에서 국제화가 가장 잘된 학교가 되도록 해야 한다. 미국에는 NAFSA(국제교육자협회), 유럽에는 EAIE(유럽국제교육박람회) 등 국제 교육기구가 있는데 사실 고등교육 시장이 가장 큰 아시아에는 그런 것과 비견될 만한 조직이 없다. 아시아 대학 관계자들을 네트워크화하고 아시아태평양 국제교육기구를 만들어 우리가 주도할 수 있도록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 이 기사는 주간조선의 허락을 얻어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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