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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 하다보니 늙을 틈도 없어"
소극장 무대서 늦바람 난 이순재씨
50년 연기생활 첫 소극장 데뷔… 드라마에 영화에 강의까지 칠순 파워 자랑

▲ 이순재씨
“우리나라도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황혼기 노인이 새로운 반려자 찾기를 수줍어해서는 안됩니다. 자식들이라도 먼저 나서줘야 합니다. 그래야 삶에 대한 새로운 의욕이 생깁니다.”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를 공연 중인 배우 이순재(70)씨를 10월 26일 서울 대학로 축제소극장에서 만났다. 그는 ‘늙은 부부 이야기’에서 바람둥이 신사 박동만 역을 맡아 이점순(성병숙 분) 할머니와 동거를 하며 황혼의 사랑을 나누고 있다. “대학로 소극장 연극은 처음입니다. 이번에 안 하면 평생 못해볼 것 같아서요. 그런데 소극장 무대는 관객과의 거리가 지극히 가까워서 TV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들 하시네요.”

이씨는 연극, TV드라마 출연은 물론 영화도 세 편이나 작업 중이다. 영화 ‘모두들, 괜찮으세요’에서는 치매 노인, ‘파랑주의보’에서는 진한 첫사랑의 추억을 가지고 사는 장의사, ‘음란서생’에서 주인공 윤서(한석규) 아버지 역을 맡았다. “항상 일이 있어서 늙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운동으로는 가끔씩 조깅과 골프를 하고 있죠.”

칠순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는 대학에서 후배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1998년부터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연극 워크샵’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과 함께 작품을 올리다 보면 저도 젊어져요. 예전에 연기자를 향해 달리던 제 모습도 볼 수 있고요. 어릴 적 생각도 많이 나죠.”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이씨는 2남 중 장남으로 네 살 때 조부모를 따라 서울에 왔다. 당시 그의 할아버지는 비누공장을 운영했다. 이씨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부모님도 월남했고 가족은 모두 대전으로 내려가 비누공장을 계속했다. 여유있는 집안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던 이씨는 서울고를 나와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사실 아주 어릴 적 꿈은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막연하게 정치를 해보고 싶었죠. 그래서 대학도 정치학과에 가려다가 점수 때문에 철학과를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철학과에 가보니 기라성 같은 교수님이 너무 많이 계셨어요. 이분들 체취만 맡고 졸업해도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전과(轉科)를 포기하고 눌러앉았죠.”

이씨가 본격적으로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라고 한다. 당시 그는 친구들로부터 ‘영화 박사’로 통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영화를 정말 많이 봤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화도 많이 볼 수 있었죠. 이때 좋은 연기를 많이 본 것이 연기자 생활에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특히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을 통해서는 ‘연기도 훌륭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일단 극장에 들어가면 하루종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영화는 여러 번 봤습니다. 영국 감독 캐롤 리드의 ‘심야의 탈주’의 경우 모두 7번을 봤어요. 대학교 2학년 때 두 번 내리 봤고 4학년 때 네 번 내리 보고 군대에 가서 한 번 더 봤어요. 대사를 다 외울 정도였죠.”

대학교 3학년 때부터는 연극부에서 활동했다. 1956년 유진 오닐의 ‘지평선 너머’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연기 수업을 시작한 것이다. “4학년 때는 보름간 합숙을 해야 했어요. 다행히 철학과 교수님들은 출석에 관대하셨죠. 당시 제 주임교수는 고 고형곤 박사였습니다. 고건 전 총리의 아버님이죠. 제가 연극 때문에 수업을 빠져야 한다고 말씀드리자 ‘그래, 연극도 철학이야. 열심히 해라’라며 허락해주셔서 졸업하는 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바로 군대에 갔다. 일반 부대를 거쳐 대북방송을 담당했는데 제대 후에는 민간인 팀장까지 맡게 됐다. 여기에 있으면서도 연극은 계속 했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번역극을 준비하는데 대전에서 아버지가 서울로 오셨습니다. 저를 보시고는 ‘이런 걸 꼭 해야겠냐?’라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갈 데가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아버지께서는 ‘그래, 앞으로는 어떤 일이든 일류가 되면 밥은 먹고 살 수 있겠지. 열심히 해라’라고 해주셨어요.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 뒤로 조그만 공연이라도 하게 되면 집으로 초대권과 프로그램을 보냈다. ‘용돈을 달라’는 신호였다. 부모님은 대전에서 올라와 아들을 응원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무명시절은 괴로웠다. 기계화의 흐름에 따르지 않았던 비누사업도 기울었다. 자연스럽게 용돈도 끊겼다. “선배들마저 밥은커녕 차 한잔 안사주더라고요. 알고보니 인기있는 그분들조차 수입이 변변치 않았어요. 옛날부터 어른들이 연극하면 배고프다고 그러셨잖아요.”

하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1960년 10월 한국 연극계에 남을 만한 일을 벌였다. 서울대, 연·고대 출신 동료 연극인들과 실험극단을 창단한 것이다. 이낙훈, 김동훈, 오현경, 여운계씨 등이 창립 멤버였다. “당시 국립극단과 신협이 ‘양대 산맥’이었는데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내자는 심정으로 젊은이들끼리 만들었죠.”

1961년엔 KBS TV 개국과 함께 방송 드라마를 시작했다. 제목은 ‘나도 인간이 되련다’. 당시에는 연극계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TV 탤런트를 병행했다고 한다. “조금씩 인기와 수입을 얻기 시작했죠. 용돈이 생기니까 자연스럽게 데이트를 하게 되더라고요.” 1966년엔 지금의 부인 최정희씨와 결혼했다. 최씨는 이화여대 무용과를 나와 세계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당시 명성여고 학생의 연극 지도를 했습니다. 거기에 2학년이었던 처제가 있었죠. 그녀의 언니가 동생을 잘 봐달라며 저와 사귀었습니다. 우리는 3년간 연애를 했고 결혼에 골인했죠.”

이씨는 신혼 초 연습과 출연에 바빠 집에 있는 시간이 한 달에 1주일도 안됐다고 한다. 지금은 시집을 간 딸도 “아버지와의 어릴 적 추억이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 1992년에는 MBC ‘사랑이 뭐길래’에서 가부장적인 ‘대발이 아버지’ 역으로 전성기를 맞았지만 그때조차도 집에서는 부인에게 미안해 꼼짝 못하는 처지였다고 한다.

그는 50년을 하루같이 연기자로 살아오고 있지만 그 중 10년은 정치인으로 살았다. 정치와의 인연은 고 이낙훈씨와 친구 사이인 것으로부터 비롯됐다. “이낙훈이 1980년 비례대표로 11대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그때 ‘열심히 해라, 내가 도와줄게’라고 하자 ‘그러지 말고 함께 하자’라고 하더군요. 계속 고사하다가 1988년 13대 때 출마를 하게 됐어요. 그때는 낙선했고 14대 때 당선됐습니다.”

이씨는 다시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4년간 국회의원을 지낸 것은 나름대로 보람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방송 출연자의 저작인접권 문제를 해결했을 때는 뿌듯했다고 회고한다. 앞으로는 정치보다 사회봉사 활동을 많이 하고 싶다고 한다. “작년부터 중랑사회복지협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정부보조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죠. 서류상으로는 부모, 자식이 있는데 도망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연기와 함께 여생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일호 주간조선 기자 ihseo@chosun.com
입력 : 2005.11.05 16:0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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