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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칼럼] 스위스에 있는 ‘과학계 유엔’
다국적 연구소 CERN 기초과학서 엄청난 성과

▲ 박성근/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어려서부터 이웃과 잘 어울려 지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회나 국가는 많지만 정작 그 교훈을 실천하는 경우는 드물다. 스위스는 어울림의 가치를 실천에 옮긴 대표적인 국가다. 유럽 강대국들에 끼인 탓에 전쟁의 피해를 숱하게 겪어온 스위스는 고민 끝에 1815년 영세 중립국을 선언했다. 이웃 누구와도 먼저 싸움을 걸어오지 않는 한 도발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웃 간의 분쟁에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적대적인 국가나 집단들이 자리를 함께할 때는 으레 스위스를 찾게 됐다. 유엔 유럽본부(UNOG),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등 22개의 국제기구와 170개의 비정부기구(NGO)가 스위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로 볼 수 있다.

어울림의 지혜는 과학에도 적용됐다. 제네바에는 전 세계 53개 국가와 2개 국제기구가 참여하고 있는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가 있다. 1954년 유럽 12개국이 처음 설립했으며, 지금은 국가와 인종, 종교가 다른 2000여명의 과학자들이 어울려 연구하고 있다.

CERN이 최근 새삼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전 세계 입자물리학자들이 지난 15년 동안 준비해온 거대강입자가속기(LHC·Large Hadron Collider)가 내년 완성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LHC는 엄청난 에너지로 (+)전기를 띤 입자인 양성자들을 가속시킨 후 충돌시켜서 물질을 만드는 새로운 입자인 힉스 입자와 초대칭 입자들을 찾을 계획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10월 과학기술부와 CERN 간의 공동 연구 협력협정을 체결했다. 앞으로 많은 국내 연구진이 CERN의 LHC 프로젝트에 참여해 좋은 연구 성과를 내고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위상을 세계 속에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협정 서명 후 축하모임에서 누군가 “이런 연구를 해서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사실 기초과학연구 자체가 실생활에 끼칠 수 있는 직접적인 영향은 거의 없다. CERN의 입자가속기도 물질의 근원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이지, 무슨 신소재를 개발하거나 에너지원을 찾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ERN은 일반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일상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 왔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 인터넷 문화를 가능하게 한 ‘웹(WWW)’이다. CERN의 과학자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연구원들과 정보를 공유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웹을 해결 수단으로 개발했다. 그것이 초등학생들까지 인터넷을 이용하게 만든 것이다.

또 최근엔 소설에도 등장해 화제가 됐다. 소설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이 CERN과 반물질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소설 ‘천사와 악마’를 출간할 수 있었던 것도 여기서 1995년 세계 최초로 반물질을 찾아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소설은 다빈치 코드의 전편에 해당된다.

물론 이런 일들은 전 세계 물리학계에 미친 CERN의 영향에 비하면 사소한 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초과학이 어떤 이익을 줄지 금방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 “조그만 부산물로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는데 하물며 원래 하고자 하는 일은 얼마나 큰 결과가 나오겠는가”라고 답할 수는 있게 해줄 것이다.

특히 스위스로서는 CERN으로 인해 그동안 만들어온 평화의 이미지에 덧붙여, 인류의 지혜가 자라는 보고(寶庫)이자 과학의 국제연합과 같은 연구소를 갖고 있다는 명성까지 얻은 셈이다. 스위스인들이 힘들게 지켜온 ‘어울림의 지혜’가 내년부터 어떤 빛나는 과학 성과를 가져올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박성근·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입력 : 2006.11.24 23:0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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