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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논단] '비빔밥 정신'이 21세기 이끈다

▲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미국 스탠퍼드 대학 기계공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상배 연구원의 발명이 시사주간지 타임의 ‘2006년의 발명’으로 선정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열대지방의 건물벽을 자유자재로 기어다니는 도마뱀의 일종인 도마뱀붙이의 발 구조를 모방하여 이른바 ‘끈적이로봇(stickybot)’을 만들어냈다. 발바닥에 수백 개의 인공 미세섬모를 가진 이 작은 로봇은 1초에 4㎝의 속도로 유리와 타일 등 미끄러운 벽면을 유유히 기어다닌다. 미국 국방부는 그의 발명품을 스파이 로봇으로 활용할 방법을 구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언제부턴가 옷을 만들 때 지퍼나 똑딱이(스냅·똑딱단추) 대신 사용하고 있는 찍찍이(벨크로)는 스위스의 조르주 드 도메스탈이 동물의 털에 들러붙어 먼 곳으로 이동하도록 진화한 식물의 씨를 흉내 내어 만든 것이다. 찍찍이는 이제 각종 의류나 가방은 물론 인공심장에 심실을 접합시키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다. 강철섬유는 거미가 집을 짓기 위해 뽑아내는 거미줄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얼마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자회사의 부장님이 내 연구실을 찾아왔다. 초콜릿폰이며 슬림슬라이드폰 등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휴대폰은 이미 약간의 디자인 경쟁을 제외하곤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까치, 말벌, 귀뚜라미, 소금쟁이 등 동물들의 의사소통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있는 우리 연구진과 브레인스토밍 회의를 제안했다. 그러다 보면 전혀 새로운 신개념의 휴대폰을 개발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돈 버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생물학자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신입사원 면접에서 내 연구실 출신의 학생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동물의 행동과 생태나 연구하던 사람이 전자회사에 와서 뭘 할 수 있겠느냐는 그의 의도적으로 삐딱한 질문에 내 학생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한다. “전자공학만 공부한 사람을 수백 명 모아 놓아본들 그 머리들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란 다 고만고만할 것입니다. 강화도 갯벌에서 흰발농게 수컷이 집게발을 흔들며 암컷을 유혹하는 행동을 연구한 저 같은 사람의 머리에서 잘못하면 대박 칠 아이디어가 나올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학생을 경쟁 회사에 빼앗긴 그는 아예 그를 길러낸 연구실을 찾기로 한 것이다.

인간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자연에서 배우며 살아왔다. 유럽의 동굴벽화와 울진의 암각화만 보더라도 고대의 인간들이 동물의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했음을 알 수 있다. 먹이동물의 습성을 유심히 관찰하던 ‘과학자’가 있던 동굴벽화의 집안이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는 사람들만 있는 집안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제 이런 연구를 보다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세계학계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난봄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의생학연구센터’를 만들었다.

의생학(擬生學)은 자연이 이미 고안해놓은 구조, 기능, 섭리 등을 인간의 삶에 응용하려는 노력을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하기 위해 내가 새롭게 만들어낸 말이다. 자연을 배워 응용하려면 기존의 지식체계를 넘나들 수 있는 융합 또는 통섭(統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업과 사회는 이미 컨버전스와 퓨전의 시대를 맞고 있다. 얼마 전 서울대학교가 개교 60주년을 맞아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던 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 같은 미래의 학문을 위해 ‘통섭대학원’의 설립을 제안했다.

모든 걸 쪼개어 분석하던 환원주의의 20세기가 저물고 통섭의 21세기가 열렸다. 섞여야 아름답고, 섞여야 강해지고, 섞여야 살아남는다. 학계, 기업, 사회가 함께 섞여야 한다. 이런 거대한 변화의 선봉에 일찍이 비빔밥을 개발한 우리 민족의 모습이 보인다.

최재천 · 이화여대 에코과학 석좌교수
입력 : 2006.11.22 18:53 12' / 수정 : 2006.11.23 07:4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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