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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사랑] 조선의 성폭행 처리

▲ 이덕일 역사평론가
조선시대는 성폭행에 대해서 지금보다 관대했으리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성폭행 사건은 ‘대명률(大明律)’ 범간(犯奸)조의 적용을 받았는데, 강간 미수는 장(杖) 100대에 3천리 유형(流刑), 강간은 교형(絞刑·교수형), 근친 강간은 목을 베는 참형(斬刑)이었다. 중종 23년(1528) 10월 벼슬아치인 도백손(都伯孫)이 과부를 강간하자 중종이 “상인(常人)이 강간하는 것도 옳지 않은데, 더구나 사족(士族)이겠는가?”라며 엄벌을 지시한 것처럼 지배층에 더욱 엄격한 처신을 요구했다.

화간(和姦)은 남녀 모두 장(杖) 80이었기에 여성은 강간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경우 여성의 처음 의도가 판단 기준이었다. 세종 12년(1466) 정4품 호군(護軍) 신통례(申通禮)가 관비(官婢) 고음덕(古音德)과 여러 차례 성관계를 가졌다. 고음덕은 “처음에는 거절하여 소리 내어 울었다[初拒而哭]”는 이유로 무사하고 신통례만 처벌받은 것이 이런 경우이다. 이 사건처럼 피해여성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종 26년(1531) 종친인 고령감(高靈監) 이팽령(李彭齡)이 사노(私奴) 봉원(奉元)의 딸과 관계했다. 봉원의 아우가 중매한데다 관련자가 모두 화간이라고 증언했지만, 순금이 “나는 여인이라 거역할 힘이 없어서 이틀 밤을 함께 잤다”고 답하는 바람에 강간으로 처벌받았다. 세종 15년(1469) 좌명 1등공신 이숙번(李叔番)의 종 소비(小非)는 강간하려는 주인의 이마를 칼로 내리쳤으나 무죄 방면되었다.

기녀(妓女)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폭력이 없었어도 여성의 동의가 없었으면 강간으로 처벌했는데, 피해 여성이 처벌을 원하는지 여부는 형량의 참작 대상이 아니었다. 절도 도중 강간까지 한 경우는 참형이었고, 유아 강간은 예외 없이 교형이나 참형이었다.

성범죄에 관대한 우리 사회의 그릇된 인식은 조선이 아니라 일제 때 비롯된 것이다. 근래 빈발하는 어린이 연쇄성폭행 사건이나 해고된 MBC 성추행 기자에 대해 사장이 재심을 요청한 것은 이들의 인식이 일제 때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준다. 일제의 유산인 현재의 성범죄 인식을 조선시대인들의 엄격한 인식으로 되돌려야 할 때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6.08.25 23: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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