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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한국야구 자랑스럽다

‘국보’ 선동열은 1996년 일본에 진출해 첫 등판부터 역전패를 당하더니 더그아웃 신세를 면치 못했다. 등판 기회가 와도 패전 처리 아니면 한 타자만 상대하고 물러나는 ‘원 포인트 릴리프’가 고작이었다. 아예 선수명단에서 빠지기도 했다. 선동열은 참담했지만 자존심을 묻었다. 일본야구를 배운다는 자세로 나이 서른넷에 투구(投球) 폼부터 바꿨다. 그는 99년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단기간에 100세이브포인트를 돌파하며 소속팀 주니치를 리그 챔피언에 올려놓았다.

▶1996년 스무 살 이승엽을 두고 삼성구단 임원이 야구해설가 허구연에게 귀띔했다. “웬만한 서른 살 선배보다 바르고 생각이 깊어요. 두고 보세요. 수퍼스타가 될 겁니다.” 이승엽은 2003년 아시아 홈런기록을 갈아치운 뒤 메이저리그행을 원했지만 구단들 반응이 시원찮았다. LA다저스 부사장 타미 라소다는 이번 야구 세계대회 WBC에서 이승엽을 보고 후회했다. “3년 전 다저스가 제시한 금액은 이승엽을 ‘모욕하는’ 수준이었다. 그를 일본에 뺏긴 것은 큰 실수였다.”

▶지난 16일 마지막 일본 타자가 헛 스윙을 하며 한국에 두 번째 패하는 순간, 더그아웃에 있던 스즈키 이치로의 얼굴이 TV 화면 가득 잡혔다. 그는 고개를 사납게 젖히며 뭔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소리는 잡히지 않았지만 입모양을 보면 “확”이었다. 상스런 영어 욕설 “Fuck”의 ‘F’ 발음이 안 돼 일본식으로 내뱉은 것이 분명했다.

▶지난 3일 한국이 대만과 WBC 예선 첫 경기를 치른 이래 보름 넘게 온 나라가 행복했다. 예선 통과도 낙관하기 어렵다더니 매번 “설마 저기까지” 하는 의심을 경탄으로 바꿔놓으며 6연승을 내달렸다. 미국 언론은 “저들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놀라움과 “이 시점에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야구팀”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야구 본산 메이저리그의 ‘다이아몬드’ 복판에 태극기가 꽂혔다.

▶‘폭주(暴走) 기관차 한국’이 빗속에 멈춰 섰다. 한국은 졌지만 이겼다. 경기장 안팎에서 내내 당당하고 어른스러웠다. 선수들은 화려하진 않아도 착실한 기본기와 몸을 던지는 수비, 결정적 순간에 쏟아붓는 집중력으로 서로에게 헌신했다. 덕장(德將) 김인식에서 선동열을 거쳐 이승엽에 이르는 은근과 끈기, 그 심지 깊은 ‘인화(人和)의 야구’가 4강 성적보다 훨씬 더 자랑스럽고 매혹적이었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tjoh@chosun.com
입력 : 2006.03.19 23:18 57' / 수정 : 2006.03.20 09:1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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