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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코너] 대마도의 날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에서 다케시마(竹島=獨島)의 날을 제정 공포한 데 대응하여 마산시 의회는 대마도(對馬島)의 날을 제정 공포하기로 했다 한다. 세종 1년 마산포에서 출발, 한 달 남짓 지배했던 대마도 정벌의 발대일인 6월 17일을 공포일로 잡은 것이다. 일본 문헌 ‘조야군재(朝野群載)’에 보면 일본 땅 하카타(博多)에서 이키(壹岐)섬까지 하루가 걸리고 이키 섬에서 다시 하루 걸려야 대마도에 이르며 그나마도 강풍이 아니고는 이를 수 없다 했는데, 대마도에서 한국 땅 김해의 들판에 말들 노는 것이 보이고 부산포 앞바다의 돛배가 눈에 든다고 했다. 대마도(對馬島)의 섬이름도 삼한시대의 마한(馬韓)과 맞대하고 있다 해서 얻은 이름이라 고증한 일본 문헌으로 ‘왜훈간(倭訓?)’ ‘진도기사(津島紀事)’가 있다. 대마도를 일본 발음으로 쓰시마(Tsushima)라 하는데 바로 두섬(Tusem)에서 비롯됐다고 고증하는 고고학자도 있다. 한국땅에서 보이는 대마도가 맞대하고 있는 두 개의 섬으로 보인 데서 비롯됐다는 어원설이다.

삼국시대만 해도 대마도는 아루비(阿留比)라는 무당 토족(土族)이 지배하면서 일본과 신라로부터 양식을 구해 살아왔다. 백제·고구려가 망할 무렵인 일본 천지(天智)왕 때 축성된 대마도 가네다성(金田城)을 조사한 일본 고고학회지에 보면 한국식 산성(山城)임을 확인하고 그 축성 형식이 고구려의 대성(大城)산성, 백제의 부소(扶蘇)산성,신라의 명활(明活)산성과 같다 했음은 대마도에 있어 당시 한반도 세력의 농도를 짐작케 한다.

세종조 초의 대마도 정벌은 3000척의 무장 왜구(倭寇)가 충청도·황해도까지 약탈을 일삼은 데 대한 반격으로 그들 기지인 대마도를 선점, 요격하는 작전을 펴고 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227척의 배와 1만7000여 병력으로 대마도를 급습, 배 129척과 집 1939호를 불태우고 114명의 적을 목베었다. 두지포(豆知浦)를 점령, 도피한 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에게 보낸 항복 권유문은 ‘대마도는 당초 계림(신라·新羅)에 예속되어 본시 우리나라 땅임이 문적에 뚜렷이 실려 있다’로 시작되고 있다. 그 문적이 뭣인지 알 수 없으나 조선조 초만 해도 대마도의 일본 소속이 확고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해준다.

입력 : 2005.05.26 18:40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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