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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산골소년의 성공기
싸이월드 만든 이동형 SK커뮤니케이션즈 상무
곽아람기자 aramu@chosun.com
입력 : 2004.07.22 09:35 51' / 수정 : 2004.07.22 09:55 03'


▲ 이동형 싸이월드 본부장
마을 뒷산의 도토리를 주워 책상서랍에 모아놓고 들여다보며 보물상자라도 가진 양 즐거워했던 어린시절의 추억을 어른이 돼서도 잊어버리지 않은 한 ‘산골 소년’이 사이버 ‘도토리’로 하루 1억 3000여만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20일 서울 남대문로의 SK 커뮤니케이션즈 빌딩에서 이동형(39) 싸이월드 사업본부장(SK 커뮤니케이션즈 상무)을 만났다. ‘사이좋은 사람들’을 창건 이념으로 내세워 800만명의 네티즌을 일원으로 끌어들인 이 ‘멋진 신세계’의 창조주는 그러나 자신의 성공담이 신화(神話)로 윤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인터뷰 내내 "세상 사람들을 사이좋게 만들고 싶다는 꿈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을 믿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싸이월드 내에서의 통용 화폐 명칭을 ‘도토리’로 정한 것이 자신의 아이디어라고 밝혔다. “‘사이좋다’는 컨셉과 가장 맞는 것, 흔하고 규격성이 있으면서 비싸지 않은 것을 생각하다보니 ‘도토리’가 떠올랐죠. 사이버 캐시 이름을 놓고 팀원들과 익명투표를 했는데 제가 은근히 ‘도토리’가 좋지 않냐며 로비를 했어요. 다들 촌스럽다며 반대했는데 결국은 제가 이겼지요.(웃음)”

돈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아기자기한 재미로 포장해 ‘싸이 폐인’들에게 거리낌없이 주머니를 열게 한 ‘도토리’라는 소박한 명칭에는 소백산맥을 끼고 있는 경북 영주의 산골에서 나고 자라며 형성된 그의 자의식이 그대로 녹아있다.

산기슭에서 도토리를 주워모아다 놓고는 혼자 들여다보며 부자라도 된 듯 흐뭇해하곤 했던 어린 소년은 화가를 꿈꾸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경북대 유전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소백산 기슭의 한 절에 틀어박혀 1년간을 백수로 지냈다. 진로문제 때문이었다.

“앞으로 뭐해먹고 살까…. 막막했어요. 고3때 담임선생님이 ‘유전공학이 뜬다’고 권해서 전공을 택하긴 했는데 열심히 공부해도 ‘필(feel)’이 안 오더라구요. 졸업하고 다들 제약회사에 들어가니, 유학을 가니 하는데 전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난생 처음으로 소속이 없이 사회의 변두리에서 맴돌았던 그 시절에 그는 인간에게 소속의 욕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고 했다. “불안했었죠. 공포감이 들었구요. 결국 인생을 알게 된거지만요. 그 때 일기장을 보면 ‘코 바로 밑까지 물이 차올라와 있는 호수에 잠겨있는 것 같다’고 써 있어요.”

그 무엇보다도 소속감이 필요했던 그는 1991년 “좋은 회사”라는 대학동기의 말 한마디만 믿고 무작정 LG-EDS(현 LG CNS)에 입사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입사했지만 당시 그는 컴맹이었다. “대학시절 하숙을 같이했던 친구들이 컴퓨터 통신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야단법석이었지만 저는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회사에 들어가 키보드라는 걸 처음 봤어요. 입사 일주일째 되던 날 A4 한 장짜리 문서를 워드로 작성하라는 과제가 떨어졌는데 그걸 하느라 토, 일요일 이틀을 특근을 했으니 말 다했죠.”

그는 “LG에서의 첫 3년 내내 ‘찍힌 사원’이었다”고 했다. “컴퓨터를 전혀 몰랐으니까요. 지방 공장의 자동화 공정 처리과정에 대한 보고서를 써내라는데 1장밖에 못 써낸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지방 공장에 출장을 보내달라고 해서 컴퓨터가 뭔지를 배웠지요. 회사에서 졸지에 유명해졌죠. 나쁜 쪽으로요.”

잘 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컴퓨터를 열심히 배웠다. “나는 새로운 일에 항상 도전하는 편이에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라는 걸 처음 접해보니 유전공학을 하며 생물학에서 배운 것과 똑같더라구요. 프로그램 코드라는 것이 DNA 코드와 똑같더군요. 그 때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신의 존재를 믿게 됐죠. 인간이 컴퓨터를 만든 것처럼 누군가 이 세상을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하느님의 일을 인간이 똑같이 흉내내고 있구나, 인간이란 게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흉내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당시 직원들의 컴퓨터 사용 능력을 중요시했던 회사는 매번 평가를 거쳐 하위 30%를 퇴사시키곤 했다. 간신히 해고는 면했지만 그의 성적은 늘 바닥이었다. “성적이 나쁘니 대우도 안 달라지고, 내가 쓸모가 있을 때는 사내 행사때 벽화 그릴 때밖에 없고…. 답답하더라구요. 마침 1995년에 김영삼 정부에서 ‘금융종합과세 프로젝트’라는 걸 했어요. 프로그래밍도 있었지만 시스템 구축 계획이 많았어요. 당시 상사한테 ‘나 여기선 비전 없으니 프로젝트팀으로 보내달라’고 졸랐어요. 정부에서 뛰어난 사람을 차출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열등생 주제에 감히 지원을 한 거죠. 뜻이 가상해서 그랬는지 상사도 나를 쫓아버리고 싶어서 그랬는지 어쨌든 받아들여졌어요.”

기회는 그렇게 찾아왔다. 시스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기획하는 일이 그는 적성에 맞았다고 했다. 입사 이후 처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들을 해 나가면서 그는 새로운 세계와 조우(遭遇)했다. 인터넷이었다. “미국 IR 기업을 벤치마킹하다가 인터넷(internet)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어요. 사전을 찾아보니 ‘전 세계 사람을 다 연결한다’는 뜻이었어요. 그 때부터 이것과 관계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프로젝트는 성공을 거뒀고 팀원들에게는 인센티브가 주어졌다. 대부분 미국유학을 택했지만 창업을 꿈꾸고 있었던 그는 주저없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경영공학석사과정에 1998년 입학했다.

싸이월드는 지난 1999년 8월 한국과학기술원 테크노경영대학원 내 전자상거래 동아리인 ‘EC클럽’ 멤버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동아리원들이 모여 논문 주제를 논의하던 중 인맥구축을 중심으로 하는 인터넷 사이트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 당시 4명이었던 창업 동지들은 각자의 관심사를 좇아 하나 둘 싸이월드를 떠나갔고 그는 1999년 12월부터 대표이사직을 맡으면서 싸이월드의 모든 것을 총괄하게 됐다.

“내 관심사는 창업 당시부터 지금까지 ‘사이좋은 세상’이에요. 사이트 이름의 첫 두 음절이 ‘사이버(cyber)’의 ‘싸이’가 아닌 ‘우리 사이’의 ‘사이’를 뜻한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그는 자신의 ‘사이월드’가 된소리가 발음하기 편하다는 이유때문에 ‘싸이월드’로 굳어져가는 것을 내심 서운해 했다.

그가 인맥구축 사이트를 만들고자 했던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 좀 달랐다. “사람들이 거래 성사나 사업을 위해 타인의 정보를 얻으려고만 인터넷을 사용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과 인간적으로 친해지고 싶어서 인터넷을 이용하는 게 보다 보편적이라고 여겼죠.”

그는 “세상의 모든 서비스는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라며 “그 욕구의 해소방식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고 했다. “인터넷 공간에서 존재하게 하고, 소속감을 느끼게 하며,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존경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것…. 그런 것 자체가 가치를 가져다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돈이 벌리기 전에 투자자들은 동화같은 이야기만 한다며 나를 욕했지만.(웃음)”

초기의 싸이월드는 자신과 학연·지연 등으로 묶여있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그들과 인맥을 맺도록 해주는 인맥 구현 시스템으로 현재 모델과는 차이가 컸다. 한때 15억원 이상의 적자에 시달리면서 두 번의 구조조정이라는 아픔을 겪기도 했던 싸이월드가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미니홈피·미니룸 서비스의 힘이다. 싸이월드는 2002년 2월과 3월에 각각 미니홈피·미니룸 서비스가 도입되면서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 회원 수가 200만여 명으로 증가하면서 그 해 연말에는 드디어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이 본부장은 미니홈피 서비스를 처음 시작한 날의 매출을 아직도 기억한다. “22만원이었어요. 당시 돈이 너무나 아쉬웠기때문에 정확히 기억하죠.” 그는 “미니홈피 서비스는 싸이월드의 위기상 황을 타개하기 위한 마지막 출구를 찾던 중 떠올린 아이디어”라고 했다.

“그 무렵 개인 홈페이지 서비스업체들이 많이들 사라지더라구요. 소비자들의 요구는 있는데 서비스가 안 되는 이유를 찾아보니 만들기와 홍보가 어렵기 때문이더라구요. 인맥구축 메커니즘으로 홍보문제는 이미 해결돼 있던 싸이월드의 이점을 살려 홈페이지를 만들기 쉽도록 하는데만 총력을 기울였죠.”

그는 “미니홈피·미니룸의 모델은 철저히 현실에서 찾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오프라인상에서 친구들과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하는 행위들을 면밀히 관찰했어요. 작은 선물을 주고받고, 앨범을 보며 예쁘다고 칭찬하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행위들을 온라인상에서도 그대로 구현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사람들을 사이좋게 만들기 위한 그의 제 1원칙은 사이버 공간이 가지고 있는 삭막함을 완전히 씻어내는 것. 그는 선물 아이템명에 반드시 형용사를 붙여 주는 이의 마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고, 흡사 시뮬레이션 게임을 보는 듯한 시나리오, 마법과 동화의 환상을 최대한 이용해 사용자들의 친밀감을 높였다고 했다. 싸이월드는 디지탈 카메라 이용자의 증가와 프리챌 유료화 바람을 타고 점차 인기를 더해갔다.

지난해 8월 싸이월드는 SK에 합병됐다. 회원 수가 급증하다보니 자연히 시스템이 느려졌고 속도 개선을 위한 설비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자본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그는 과감히 합병을 택했다. “합병하고나서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 아깝지 않냐는 거였어요. 제 3자가 볼 때는 합병 이후 더 잘 되니 배아프겠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그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가치관이 달라진다”고 했다. “딸이 생기고 나니 이 아이를 나보다 더 잘 키워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보내도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싸이월드는 제게 자식과 마찬가지예요. 합병 당시부터 지금까지 회원수가 500만명 가량 늘었죠. 문 밖에 사람들이 길게 줄 지어 서 있었는데 이제껏 한 두 명밖에 들어오지 못했던 거죠. SK는 그 문을 넓혀줬어요. 고마울 따름이지요.”

불과 5년새 인터넷업계의 기린아로 우뚝 섰지만 초 단위로 판세가 뒤바뀌는 인터넷 시장에서 싸이월드의 미래를 장담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성급한 이들은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금세 시들해졌던 동문(同門) 찾기 사이트와 싸이월드가 궤적을 같이할 것으로 점치기도 한다.

그는 “싸이월드는 생활”이라는 명료한 답변을 내놓았다. “학교 동문은 과거의 관계지만 싸이월드는 현재의 관계를 기반으로 해요. 동료나 친구는 한 번 보고 끝나는 게 아니지 않나요. 미래요? 나는 죽으면 내 후손들이 나를 기억해주길 바래요. 내가 썼던 글과 말, 나와 친했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요. 500년, 1000년이 지난 후에도 내 후손들은 미니홈피를 통해 나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오래 전에 죽은 유명인들의 삶도, 싸이월드를 통해 기억될 거구요.”

그는 네살배기 딸아이의 미니 홈피를 직접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딸이 자라면 ID와 패스워드를 건네주며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 줄 예정이란다. “미니홈피를 운영하면서 타인으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고싶다는 인간의 욕망이 참으로 거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내 미니 홈피를 타인이 찾아주기를 바란다면 홈피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없죠. 다른 사람의 미니홈피를 방문해 글을 남기는 것밖에 도리가 없어요. 세상살이란 남에게 베푸는만큼 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싸이월드의 정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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