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취임 100일을 맞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0일 동안 서명한 행정명령은 142개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42개)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19개)의 기록을 훌쩍 넘었고, 2017년 1기 행정부 시절 자신의 기록(33개)보다도 많았다. 속도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한 차례 대통령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바이든 정부 시절 차곡차곡 재집권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권력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트럼프는 전광석화같이 행동했다.
142개 행정명령에는 그의 지지층이 환호하는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 예컨대 트랜스젠더의 여성 스포츠 참여 금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불법 이주자 추방 등은 보수층의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헌법적, 절차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행정명령도 적지 않았다. 정부 재정 적자 감축을 위해 연방 기구를 하루아침에 통합 또는 폐지하거나, 미국에서 태어나면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출생시민권제도 폐지는 소송 대상이 됐다. 글로벌 시장에 충격을 불러온 관세 부과도 행정명령을 통해 단행했다.
눈여겨볼 점은 이 과정에서 공화당에서 별다른 반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화당은 작년 11월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다. 절대 권력을 가진 트럼프 눈치를 본 공화당은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트럼프에게 박수 치기 바빴다. 행정부의 폭주에 입법부가 침묵 또는 동조로 일관하자 하루가 멀다 하고 행정명령 폭탄이 떨어졌다. 유일하게 트럼프 열차에 제동 장치를 한 곳이 법원이다. 현재 미 전역에서 행정명령에 대항한 소송 수십 건이 진행되고 있다. 일부는 법원에서 인용돼 행정명령 효력이 중지됐다. 심지어 보수 우위의 연방 대법원도 지난달 ‘적성국 국민법’에 따른 이주자 강제 추방 조치를 막아섰다. 화가 난 트럼프는 자신의 정책에 제동을 건 판사 실명을 거론하며 “탄핵돼야 한다”고 했다.
현재 한국과 미국 정치 상황은 닮아 있다. 지금은 뇌리에서 잊혔지만 지난해 대선에서 야당 후보였던 트럼프는 4개 형사사건 피의자로 재판을 받는 중에 당선됐다. 집권당이던 미국 민주당은 대선 후보였던 바이든 전 대통령이 선거를 100여 일 앞둔 상황에서 후보직에서 사퇴하며 허겁지겁 대안 후보를 냈다. 한국 민주당은 트럼프가 장악해 이견(異見)이 나오지 않는 미 공화당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대법원이 입맛에 맞지 않는 판결을 내리자 민주당은 대법원장 탄핵을 운운하기도 한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한 권력이 얼마나 무소불위인지는 전 세계가 체험하고 있다. 국민은 분열되고 시장은 불확실성을 경험하며 공동체 의식은 사라졌다. 정치가 사법부까지 흔들며 민주주의 골격인 삼권분립도 위태하다. 트럼프의 100일이 100년처럼 느껴졌다는 미국인이 꽤 많다. 미래가 훤히 보이는 그 길을 우리가 답습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