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국 지도자와 세계 최고 갑부의 130일간 ‘동거’가 끝났다. 지난 1월 출범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2기 행정부의 신설 조직 ‘정부효율부(DOGE)’를 이끌어온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의 퇴임 행사가 지난달 30일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열렸다. 행사를 직접 주관한 트럼프는 “정말 대단한 개혁가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백악관 문양이 새겨진 ‘황금 열쇠’를 머스크에게 전달했다. 트럼프는 1기(2017~2021년) 때부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고(故)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등 친밀했던 인사들에게 ‘언제든 백악관으로 올 수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은 열쇠를 선물해 왔다.
머스크가 “DOGE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앞으로도 대통령의 친구이자 조언자로 남고 싶다”고 하자 트럼프가 “일론은 떠나지 않는다. 그는 백악관을 오가게 될 것”이라고 화답하는 등 두 사람은 짙은 브로맨스(남자들끼리의 끈끈한 우정) 분위기를 연출했다. 백악관 오벌 오피스(대통령 집무실)에서 함께 사진도 찍었다.
검은색 ‘DOGE’ 로고가 찍힌 모자와 ‘DOGE의 대부(The Dogefather)’라는 문구가 찍힌 티셔츠 차림으로 온 머스크는 오른쪽 눈가에 멍이 선명했다. 그는 취재진에게 “다섯 살 아들 엑스와 장난치다 얼굴을 맞았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엑스를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머스크의 ‘해명’을 거들었다.
머스크는 트럼프의 대통령 선거 승세가 굳어진 지난해 하반기부터 트럼프 2기 최고 실세로 떠올랐다. 대선 때 약 2억7500만달러(약 3805억원)를 트럼프 캠프에 쾌척하며 ‘실탄’을 지원해 당선에 큰 도움을 줬다. 트럼프는 당선 한 주 만인 지난해 11월 12일 정부효율부(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 신설과 머스크의 수장 발탁을 동시에 발표했다. 부서 이름의 약자인 도지(DOGE)는 머스크가 코인(가상 화폐) 시장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해 ‘머스크 코인’으로 알려진 ‘도지 코인(dogecoin)’과 철자가 같다. 그만큼 트럼프 2기에서 머스크의 위상이 높았다는 점을 드러낸 작명이었다.
트럼프는 이즈음 대통령의 ‘1호 친구(first buddy)’란 별명을 얻은 머스크에게 불필요한 정부 예산을 절감하고 비대한 연방 정부를 구조 조정하라며 사실상 전권을 줬다. 머스크는 ‘칼자루’를 거침없이 휘둘렀다. 제3세계에 대한 대외 원조를 도맡으며 미국 공공 외교의 큰 축을 담당해 온 국제개발처(USAID)를 시작으로 소비자금융보호국, 인사관리처 등 주요 정부 부처에 대해 국익과 정부 기조에 맞지 않는다거나 예산 낭비의 주범이라는 등의 이유로 축소·폐지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7만5000명 이상의 공무원을 압박해 스스로 옷을 벗게 하거나 해고했다. 야당인 민주당과 민주당 지사가 이끄는 주 정부, 공무원 조직과 잇따라 충돌했고 소송이 잇따르면서 행정부와 사법부 간 유례없는 갈등 국면이 조성됐다.
머스크는 DOGE를 출범시키면서 정부 구조 조정을 통해 ‘1조달러 삭감’을 목표로 내걸었지만, 실제로 달성했다고 발표한 절감액은 1750억달러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이마저도 부풀려진 수치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 2월 DOGE가 재무부가 소장한 연방 공무원 급여 내역, 사회보장 혜택 등 개인 정보에 접근하려다 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리는 등 다른 부서에 대한 월권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백악관 참모들은 머스크가 정부효율부 결정 사항을 사전에 공유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백악관을 떠나는 머스크가 트럼프와 ‘아름다운 이별’을 하지는 못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특히 트럼프 정부의 다른 고위직과 갈등이 잇따라 표출됐다. 예를 들어, 머스크는 트럼프의 ‘관세 책사’로 알려진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담당 고문을 향해 “벽돌보다도 멍청하다”고 비난을 퍼부어 갈등을 빚었다. 트럼프와 머스크의 관계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머스크는 퇴임 직전 한 CBS 인터뷰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 중인 감세 법안에 대해 “재정 적자를 키우는 대규모 지출 법안”이라며 비난했다. 트럼프는 “우리가 예산을 삭감만 할 수는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처럼 머스크와 트럼프 진영의 긴장 국면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으면서 트럼프는 예정된 임기 만료(5월 30일) 시점에 맞춰, 머스크의 정부 참여를 더 연장하지 않고 ‘정리’로 방향을 잡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머스크의 ‘멍’에 빗대 “머스크를 때리고 싶은 여섯 그룹이 있다”며 “정부 관료, 해고된 공무원, 트럼프 참모진, 테슬라 투자자,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 다양한 집단이 머스크의 강압적 행보에 분노했다”고 전했다.
130일 동안의 ‘공무원 생활’은 머스크의 사업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남겼다. 핵심 사업체 테슬라는 머스크가 백악관에 있는 동안 혹독한 1분기를 보냈다. 공무원과 정부 기관에 대한 무지막지한 칼바람 등 거친 행보에 대한 반감이 쌓이면서 미국 전역에서 테슬라 전기차에 대한 방화·훼손이나 테슬라 매장에 대한 총격 등의 행위가 잇따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1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71%나 급감했다. 머스크는 지난 4월 실적 발표 후 가진 콘퍼런스 콜(투자자 회의)에서 “DOGE 주요 업무가 끝나 다음 달부터는 더 많은 시간을 테슬라에 할애하겠다”며 주주 달래기에 나서야 했다.
반면 머스크의 우주 기업 ‘스페이스X’가 국방부 위성 발사 계약과 위성 인터넷 사업에서 수십억 달러어치의 계약을 따내는 등 이득도 챙겼다. 머스크는 트럼프 측 정치 조직에 1억달러를 추가 후원할 계획을 밝히는 등 트럼프 행정부와의 인연은 물밑에서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머스크는 “DOGE는 특정 인물에게 의존하지 않고 조직적 기조로 운영될 것”이라며 자신이 떠나도 DOGE의 철학은 남는다고 말했다. 후임 DOGE 수장은 정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