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권에 시간당 100㎜ 이상의 폭우가 쏟아진 지난 8일 곳곳에서 구조 요청이 쏟아지며 분주했던 소방관들 대신 작은 소화기만 든 채 화재 진압에 나섰던 여러 경찰관들이 화제다. 유례없는 폭우 속에서 경찰관이나 소방관 모두 소속이나 원래 역할과 무관하게 시민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시민들 반응이 잇따르고 있다.
“쾅! 하고 번개가 쳤는데 집 주변에서 타는 냄새가 나요. 빨리 와주세요!” 지난 8일 오후 9시 28분쯤 112에 이런 신고가 접수됐다. 당시 소방서에 구조 요청이 폭주해 연결이 되지 않자 한 시민이 경찰서로 화재 신고를 한 것이다. 그러자 인근에 있던 서울 광진경찰서 자양1파출소 소속 조현덕(52) 경위와 경력 1년도 안 된 시보(試補) 신분의 한수호(27) 순경이 광진구 자양동 성동초등학교 인근으로 출동했다. 비로 온몸이 흠뻑 젖은 주민 10여 명이 “어디서 매캐한 냄새가 난다”며 집 밖에서 불안해하고 있었다.
두 경찰관은 주민들과 주변을 둘러보다 불이 난 한 건물 공사 현장을 발견했다. 파란색 천막으로 공사 현장이 가려져 있어 불길이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비가 세차게 오고 있었지만 건물 안에서 불은 이미 1층을 휘감고 2층으로 옮겨붙고 있었다. 조현덕 경위는 “특히 건물 입구 쪽에 전기 시설이 보여 잘못하면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두 경찰관은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를 크게 키워 주민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렸다. 그리고 순찰차에 있던 소형 소화기를 들고 현장으로 뛰어들어가 불을 끄기 시작했다. 방화복이나 방독면 같은 장비도 없었다.
그때 인근 주민들이 하나둘씩 집에 있던 소화기를 갖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모인 소화기 20여 개로 불이 번지는 걸 30분간 막아냈더니 마침내 소방차가 왔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주민은 광진경찰서 홈페이지에 “굵은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화재를 진압하려고 애쓴 두 경찰관의 행동에서 우리 지역의 영웅 모습을 봤다”고 썼다.
광진구 건물에 불이 났던 8일 같은 시각 서울 강남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오후 9시 30분쯤 한 산후조리원에 빗물로 누전 사고가 난 것이다. 이곳 역시 폭우로 소방관들이 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인근에서 교통 정리를 하고 있던 서재원(33) 경위와 강소연(26) 순경이 출동했다. 서 경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기 시설 쪽으로 빗물이 흘러 합선이 일어나면서 스파크가 발생해 소화기로 불을 껐다”고 했다. 산후조리원 복도에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찼는데 두 경찰관은 방독면 하나 없이 현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들은 산후조리원 직원과 함께 당시 건물 내부에 있던 산모와 신생아 등 30여 명도 모두 대피시켰다.
경찰관과 소방관들은 수해 구조도 소속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인천 서부경찰서 검단지구대 김종성(33) 경장은 지난 9일 인천 안동포 사거리에서 물이 무릎까지 차오른 상황에서 차 바퀴까지 물이 차올라 오도 가도 못하고 있던 운전자를 구조했다. 김 경장과 김태영(25) 순경은 지대가 높은 곳까지 차를 손으로 밀었다고 했다. 올해 1월 임용된 새내기 서울 동작서 남성지구대 최형호(30) 순경은 지난 8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 다세대주택 반지하 방에 갇혀 있던 80대 노인을 구조하기도 했다. 물이 성인 허리까지 차올랐지만 물속에 들어가 쇠지렛대로 문을 아예 뜯어냈다고 한다.
또 경기 양평에서는 지난 9일 “산사태로 무너진 집에 사람이 갇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들도 화제가 됐다. 신고가 접수된 양평군 단월면 삼가리의 한 주택은 산사태로 진입 도로가 없어진 상태였다. 소방관들은 그 옆의 야산을 넘어 마을 근처로 가기로 했다. 산을 넘었더니 이번에는 마을로 통하는 개천의 돌다리가 물에 잠겨 있었다. 이들은 개천 옆 나무에 로프를 매달고, 로프를 붙잡고 개천을 건너 집에 깔린 사람을 구조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