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한국 시각)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햄에 있는 야구장 릭우드 필드에서는 특별한 경기가 펼쳐졌다. 미 프로야구(MLB)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맞붙은 곳.
두 팀이 연고지가 아닌 이곳까지 날아온 건 릭우드 필드가 담고 있는 사연 때문이다. 이 곳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야구장이다. 보스턴 레드삭스 홈구장 펜웨이 파크(1912년)나 시카고 컵스 홈구장 리글리 필드(1914년)보다 앞선 1910년 개장했다. 프로야구 경기장이긴 했지만 MLB 선수들이 뛰는 곳은 아니었다.
인종차별 탓에 메이저리그는 물론 마이너리그에서도 뛸 수 없던 흑인들이 모여 만든 니그로리그(Negro League) 소속 버밍햄 블랙배런스 홈구장이었다. 1948년 10월 니그로리그 월드시리즈 마지막 경기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흑인 최초 메이저리그 선수로 인종차별 벽을 깬 재키 로빈슨 생애를 그린 영화 ‘42′를 촬영한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이번 경기는 MLB 역사 중 하나인 니그로리그를 기념하고 윌리 메이스를 추모하기 위해 열렸다. 윌리 메이스는 블랙배런스 소속으로 릭우드필드에서 첫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메이스는 그 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전신인 뉴욕 자이언츠로 이적했고 1972년까지 MLB 생활을 하면서 통산 660홈런 1909타점에 외야수 부문 골드글러브를 12년 연속 받았다.
메이스는 원래 이날 참석하기로 했지만 지난 18일 건강 상태를 이유로 불참한다고 밝혔고, 다음 날 미국 캘리포니아 팰로앨토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메이스는 “10대에 야구를 했던 바로 그 경기장에서 MLB 경기가 열리는 것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메이스는 없었지만 아들 마이클, 그리고 MLB를 대표하는 흑인 선수이자 메이스의 대자(代子) 배리 본즈, 켄 그리피 주니어가 함께 관중 앞에 섰다. 이들은 경기 시작 전 릭우드 필드 홈플레이트 앞에 그려진 거대한 숫자 ‘24′ 앞에서 메이스를 기렸다. 24는 메이스를 상징하는 등번호로 자이언츠 영구결번이다. 팬들은 모두 기립 박수를 치며 “윌리”를 외쳤고, 메이스 블랙배런스 동료 중 한 명인 윌리엄 그리즌(100)이 부축을 받은 채 시구를 던졌다. 이날 경기는 6대5로 카디널스가 승리했다.
이 경기 심판진은 MLB 역사 최초로 5명 모두 흑인으로 이뤄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MLB 심판진 70여 명 중 5명에 불과한 흑인 심판이 모두 이날 한 경기에 기용됐다. 이들은 최초 흑인 심판인 애밋 애시퍼드를 기념하는 패치를 착용하고 경기를 주관했다. 심판진 조장 에이드리언 존슨(49)은 “전체 심판진을 흑인으로 구성하고 비디오 판독심까지 갖출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인원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오래 걸렸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지금까지 메이저리그 정규 경기에서 활동한 흑인 심판은 11명에 불과하다.
폭스 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중계된 이 경기는 5회초 잠시 흑백 화면에 1954년 형식으로 분할 화면, 구식 스코어보드 등을 삽입, 올드 팬들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자이언츠와 카디널스는 각각 니그로리그 샌프란시스코 시라이온즈, 세인트루이스 루이스스타즈가 입었던 유니폼을 현대적으로 재현해 입었다. 자이언츠는 메이스를 기리기 위해 구단 버스에서 내릴 때 블랙배런스 모자와 메이스가 입었던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내렸다.
자이언츠 외야수 마이크 야스트렘스키는 할아버지 칼 야스트렘스키와 아버지 칼 마이클 야스트렘스키 주니어가 뛰었던 경기장에서 그라운드를 밟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됐다. 할아버지는 레드삭스 선수 시절 1971년 이곳에서 뉴욕 양키스와 시범 경기를 가졌고, 아버지는 화이트삭스 마이너리그 선수 시절 1986년 더블A 버밍햄 소속으로 이 경기장에서 뛰었다. 야스트렘스키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70년 전에 경기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MLB 사무국이 이날 행사를 연 건 과거를 기리기 위함도 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측면도 있다. 최근 미 야구계는 비싼 야구 강습료 등으로 흑인 선수들이 미 프로농구(NBA)나 미 프로풋볼(NFL)로 유출되는 고민을 겪고 있다. 1981년 MLB 선수 중 18% 이상이던 흑인(아프리카계 미국인) 비율은 꾸준히 줄어 2021년 7%에 불과했다. 이날 경기에서도 흑인 선수는 자이언츠 조던 힉스와 카디널스 마신 윈, 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