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평북 정주, 어머니는 함남 신흥이 고향이었다. 1980년 먼저 가신 아버지를 북녘 땅 가까운 파주에 모신 뒤, 2003년 어머니도 곁에 모셨다. 그런데 7년 전 아파트 부지로 수용됐으니 묘를 옮기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장할 때 어머니 작은 뼈 하나 따로 챙겼어요. 언젠가 북녘 고향 땅에 모셔드리려고.” 어머니의 뼛조각에서 시작된 상상으로, 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공연된 연극 ‘이장(移葬)’을 쓰고 연출했다. 극단 골목길 박근형(60) 예술감독은 이 작품으로 제17회 차범석연극상을 받는다.
김상열 연극상, 대산문학상, 대한민국 연극대상, 동아연극상 등 연극으로 받을 수 있는 상은 거의 다 받은 극작가이자 연출가. ‘청춘예찬’ ‘쥐’ ‘경숙이 경숙아버지’ ‘너무 놀라지 마라’ 등 그의 작품을 아는 이라면 이번 수상이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7일 서울 명륜동 극단 연습실에서 만난 박근형은 “변변찮은 사람에게 너무 큰 상”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차범석 선생님 성함으로 주시는 상인데요. 연극제 같은 데서 몇 번 뵈었지만 저는 말석에서 겨우 인사만 드릴 정도였어요. 뭐 하나 반짝 잘 써서 주는 상이 아니라 쭉 살아온 내력과 사연을 봐주신 것 같아서, ‘애썼다’ ‘고생했다’ 하시는 상 같아서 더 기뻐요.”
서울 마포 염리동에서 실향민 부부의 4녀 1남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공부보다 연극이 좋았다. 연극을 하면 세상을 떠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도 했다. 70~80년대 전위연극의 산실이던 연출가 기국서(71)의 극단 ‘76단’에서 배우로 연극을 시작했다. “연극이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과 함께 가는 방법일 수 있다는 걸 거기서 배웠죠.”
한 해 100여 편씩 연극을 봤다. 워낙 낯이 익어 문예회관(현 아르코예술극장) 같은 데선 매표소에서 그를 슬쩍 들여보내줬다. 그는 “김상열(1941~1998) 선생 같은 분들을 마음의 스승으로 여기며 어깨너머로 배운 셈”이라고 했다.
수상작 ‘이장’에서 남편 묘를 이장해야 하는 어머니는 누군가 벽 속에서 톡톡 두드리며 ‘살려달라’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내 가슴에 깨진 유리창이 백만 장이 넘는다”는 어머니에게, 바람난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두문불출하는 아들은 “내 어깨에도 벽돌 150장쯤은 얹혀 있다”고 대꾸한다. “‘우리 집 한옥이 이렇게 컸다’ 같은 대사는 실제로 제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이에요. 연극에서처럼 고향집 지도도 그려두셔서, ‘제가 나중에 한번 찾아가 볼게요’ 했었는데….” 박근형에게 올해 차범석희곡상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건네주신 상인 셈이다.
젊은 박근형은 체호프보다 페르난도 아라발, 해럴드 핀터 같은 전후 유럽 연극에 끌렸다. “사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허무맹랑하게 갑자기 들이닥치는 비극 같은 것, 그런 게 속시원하고 솔직하게 가슴에 와 닿더라고요.” 기존 희곡 독법으로는 해독할 수 없는 핀터의 희곡들은 특히 충격적이었다. 집에서 대학 등록금 하라고 받은 돈을 털어 연극 포스터 붙이러 몰려다니던 친구들과 핀터의 ‘귀향’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배우 대신 연출의 길로 들어선 뒤 대학생들의 연극을 지도하는 대학극 연출로 10여 편을 무대에 올린 것도 큰 공부가 됐다.
극장 ‘혜화동 1번지’에서 소품 겸 갈탄 난로 하나 피워 놓고 연극 ‘쥐’(1998)를 올렸을 땐 불기운으로 따뜻해진 극장에서 자고 가려는 대학로 배우들이 극장 앞에서 진을 쳤다. 그날 입장 수입을 전부 술과 안주로 바꿔 먹은 배우들이 다음날 라면까지 끓여 먹고 나가면 다시 난로를 피워 연극을 올렸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나요. 너무 재밌었어요, 하하.”
1999년 “이것까지만 하고 이젠 접어야지” 하며 올린 ‘청춘예찬’에 관객이 줄을 서고 연장 공연이 이어지며그의 흥행작이자 출세작이 됐다. 박해일, 윤제문, 고수희 등 지금은 스타가 된 배우들이 출연했다. “연극 한다고 어머니 집까지 다 날렸던 때거든요. 하류 인생이라고 그 삶이 가치 없는 걸까 하는 생각으로 만들었는데, 아버지들은 직장을 잃고 가정은 쪼개지던 IMF 외환 위기 때 풍경과 겹쳐 보였나 봐요.”
2003년 극단 골목길을 세웠다. 정식으로 연출이나 극작을 배운 적이 없지만, 현장에서 바닥부터 익힌 기술과 탁월한 감각으로 그만이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다. 그의 연극엔 예전 주택가 골목길에서 마주쳤을 법한 술 취한 아저씨, 실직한 가장, 괴팍한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넘쳐난다. 밀려나고 소외된 사람들, 곡절 많은 하류 인생을 향한 애정이 한결같다. “저는 ‘위대한 개츠비’ 같은 도회적인 얘기는 잘 몰라요. 좀 농담 같지만, 그런 작품은 무대도 번듯하고 의상비도 많이 들고 좋은 와인 잔도 나와야 되잖아요, 하하.”
배우들에게 믿고 맡기는 스타일, 끊임없는 관찰로 배우의 특징을 뽑아 무대에 녹이는 연출로도 유명하다. 그의 연극 속 배우들은 세련된 교과서적 언어가 아니라 펄펄 살아 뛰는 시장통의 언어로, 꾸며서 하는 연기가 아니라 자신도 몰랐던 본연의 얼굴로 무대에 서게 된다. “끊임없이 강조하죠. 기세가 있어야 된다. 대사가 생각 안 나도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라. 마음껏 놀아라. 대신 겸손해라. 못해도 열심히 해라.” 그런 그에게 이끌려 박해일은 오토바이 타는 건들건들한 고등학생이 됐고, 윤제문은 무대에서 피리를 불었으며, 장영남은 노래방 도우미 뛰는 며느리로 나와 탬버린을 흔들었다.
서울예대 극작과에서 7년을 가르쳤고, 2010년부터는 한예종에서 극작과 연출을 가르친다. 그런데도 극단에 젊은 배우들이 없는 건 고민이다. “지금 단원들이 40대부터예요. 씩씩하게 해줄 20~30대가 있어야 하는데. 몇 년 안에 젊은 단원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지금 제 가장 큰 숙제예요.”
[심사평]
가감 없이 드러낸 生의 밑바닥, 남루하지만 고결하다
올해 차범석희곡상 수상작은 박근형의 ‘이장(移葬)’이다. 박근형은 1989년 ‘습관의 힘’으로 데뷔한 이후 작가이자 연출가, 극단 대표로서 연극에 꾸준히 헌신해 왔다. 그의 글과 무대가 한국 연극과 희곡에 기여한 바의 두께와 무게, 빛나는 성취에 대해서는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장’에서도 박근형은 생의 밑바닥으로 몸을 던진다. 날것의 삶을 안고 뒹굴며 그 적나라한 민낯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죽은 이의 묘지는 떠돌고 산 자는 골방에 갇혀 있다. 삶과 죽음이 서로 몸을 섞는 문턱의 세계. 그 문턱 위에서 흔들리며 꾸는 속절없는 꿈. 그것이 박근형의 시(詩)다. 남루하고 고결한. 진흙 속에 피는 연꽃처럼. /심사위원 손진책·허순자·배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