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이 지났으니 지금 입고 있는 외투가 무엇이든 간에 시기상 봄은 봄이다. 하지만 풍경만 보고 봄이라 하기에는 좀 이상하다. 언제부터인가 계절에 상관없이 엉뚱한 꽃들이 피어 있는 날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봄옷을 꺼내자마자 에어컨 리모컨을 찾기 바쁘기도 했다. 절기로 계절을 맞히기는 곤란할 때가 많아졌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태어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차례로 지내며 각 계절에 제철 음식을 먹고, 계절에 맞는 꽃을 보며 자랐다. 봄에는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었기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더 설레게 하는 해사한 꽃들을 보며 올해도 무탈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곤 했었다. 여름이면 너무 더워서 여름이 제일 싫다고 해놓고선 수박이 있는 여름이 제일 좋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가을이면 어릴 적 라디오에서 가수 이문세가 길러준 음악 감성에 맞춰 일찍 죽은 유재하 노래를 찾아 들으며 괜히 내 발보다 더 큰 플라타너스 잎에 발을 재보곤 했다. 겨울이면 친구들과 어묵 하나씩 사 먹고 아줌마가 종이컵에 담아주신 국물을 손에 들고 호호 마시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분명 그랬다. 그런데 어쩐지 계절은 사라지고 그보다 훨씬 긴 기약만이 생겼다. 봄과 가을은 얼굴만 잠깐 비추었다가 사라지고, 조금만 견디면 금세 지나갔던 장마는 우기(雨期)가 된 지 오래다. 여름과 겨울은 또 왜 이리 긴지 낯선 과일과 식물이 우리 땅에 터를 잡아간다.

이러다간 아직 18개월인 아이가 나중에 커서 “봄이 뭐야?”라고 물어볼 듯하다. “그런 게 있었어”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다. 이렇게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봄이라는 계절이 있었어. 적당히 따뜻해서 소풍 가기 딱 좋았던, 바람에 낭창낭창 꽃이 흔들렸던, 파릇한 맛을 가진 나물이 돋았던, 아빠가 처음으로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런 날이 있었어.” 이 계절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올해 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