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2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12·3 계엄을 선포해 헌법재판소에서 파면된 데 이어 전날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온 한덕수 전 국무총리와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사퇴하면서 정부가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의 대행’ 체제로 운영되게 된 것이다. 한 전 총리는 대선 출마를 위해, 최 전 부총리는 더불어민주당이 탄핵소추안 표결을 시도하자 사퇴했다. 교육부 장관이 외교·국방·경제 등 국정을 총괄하는 초유의 ‘대대대행’ 체제가 되면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위축될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태미 브루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1일(현지 시각) “우리는 한미 동맹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이주호 대행, 그리고 한국과 협력하는 데 여전히 전념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12·3 계엄 이후 지난 5개월 동안 한국 대통령 권한대행과의 협력 의지를 대외적으로 네 차례 밝혔다. 계엄·탄핵으로 한국의 국가 리더십이 자주 교체되면서 동맹국인 미국이 한 달에 한 번꼴로 한국 정부에 대한 지지 의사를 공표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부의 외교적 난맥상도 드러났다. 외교부는 지난 1일 한 전 총리가 사퇴하자 한국 주재 외국 공관들에 “최상목 부총리가 2일 0시부터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된다”는 내용의 외교 공한(公翰)을 보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최 부총리도 사임하면서 외교부는 주한 공관에 보냈던 외교 공한을 회수하고 2일 이 부총리가 권한대행직을 맡았음을 알리는 공한을 다시 발송했다.
◇美 “한국 대통령 대행과 협력” 5개월간 4차례 반복
이와 관련해 미국 블룸버그통신은 “국가의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는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이라며 “이 같은 리더십 ‘회전목마(merry-go-round)’ 상황은 대미 관세 협상에서 한국의 취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최근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작년 12·3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로 인해 국회에서 탄핵소추돼 직무가 정지된 이후 시작됐다. 이후 권한대행을 맡은 한 전 총리도 국회에서 탄핵소추되면서 최 전 부총리가 권한대행을 맡았다. 한 전 총리가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결정으로 직무에 복귀했고 그 뒤에 윤 전 대통령이 헌재에서 파면됐다. 결국 한 전 총리가 전날 대선 출마를 위해 사임하고 최 전 부총리도 사임하면서 네 차례나 권한대행이 바뀌는 등 한국의 정부 리더십이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것을 외신이 거론한 것이다.
이주호 대통령 권한대행 사회부총리는 6·3 대선 때까지 30여 일간 국가 수반이자 행정부 수반으로서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 정상적인 경우 내각은 대통령과, 그의 명을 받은 국무총리가 통할해왔다. 총리 밑에 기획재정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이 각각 경제부총리와 사회부총리를 맡아 국정 운영을 보좌해왔다. 그런데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서 파면되고 총리와 경제부총리가 각각 대선 출마와 민주당의 탄핵소추 때문에 사퇴하면서 정부는 ‘톱3’가 부재한 상황에서 초유의 ‘대대대행’ 체제로 운영되게 됐다. 이 대행은 이날 빈틈없는 국정 운영을 강조했다. 하지만 교육부 장관이 글로벌 통상 전쟁 대응과 안보, 치안, 대선 관리까지 담당하게 되면서 “정부 시스템이 사실상 붕괴 직전”이라는 것이다.
정부 고위 관료들은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전날 대법원의 이재명 대선 후보 유죄 판결 선고를 계기로 민주당이 최상목 경제부총리에 대한 기습적인 탄핵소추안 표결에 나선 것을 예상치 못했다는 것이다. 최 전 부총리는 지난달 25일 미국에서 열린 양국 재무·통상 고위급 ‘2+2 통상 협의’를 주도했고 최근엔 관련 후속 조치를 마련 중이었다. 그런 그가 한미 통상 협상 시한(7월)이 두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사퇴하면서 대미 통상 협상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7일 체코에서 열릴 체코 원전 수주 본계약 체결식도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만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정세와 정부 내 사정 등을 감안할 때 이 대행이 나라를 비우고 해외 출장에 나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통상 국가 간 수조 원대 대형 계약 체결식에는 대통령·총리 등 국가 정상급 인사가 참석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 관계자는 “체코 원전 수주는 사실상 양국 국가 수반 차원에서 성사된 계약인데 주무 장관만 참석하게 돼 난감한 상황”이라고 했다.
정부의 핵심 기능인 안보·치안 분야도 공백이 벌어질 수 있다. 한덕수 전 총리는 두 차례 총리를 지내면서 안보·치안 행정을 통할한 경험이 있다. 최상목 전 부총리도 예산 업무 등을 담당하면서 안보·치안 관련 부처 행정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주호 대행은 교육부 장관만 두 차례 맡은 교육 행정 전문가다. 더구나 계엄 사태로 인해 국방부 장관과 육군 참모총장, 주요 군 사령관들이 공석인 상황이다. 경찰청장도 조지호 전 청장이 계엄 사태로 구속돼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대선 관리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도 이상민 전 장관이 민주당의 탄핵소추 추진에 사임해 장관 공석 상태다.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정부 19부(部) 가운데 5곳이 장관 공석으로 인해 차관 직무대행 체제로 운용 중이다.
민주당이 만약 쟁점 법안을 강행 처리하고 이 대행이 이에 대해 재의(再議)를 요구할 경우 민주당은 이 대행에 대해서도 탄핵소추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이 대행이 탄핵소추돼 직무가 정지되면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맡는다. 정부 관계자는 “최상목·이주호 대행은 부총리급이었지만 유 장관부터는 장관급이 대행을 맡게 돼 정상 외교 활동도 사실상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한국을 둘러싼 대외 여건이 개선될 조짐도 보이지 않고 있다. 대미 통상 협상은 이제 초창기 단계이고, 한반도 주변 외교·안보 상황은 북·러 밀착 등으로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가 일각에서는 “6·3 대선까지 한 달 동안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