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물가 상승률이 14개월 만에 3%대를 기록했다. 아직 한국은행의 물가 안정 목표인 2%보다는 높지만, 작년 6%대까지 치솟았던 물가가 서서히 정상화되는 모양새다. 고물가가 잡히면서 정책 기조도 물가에서 경기 방어로 선회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2일 통계청에 따르면 4월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3.7% 상승했다. 상승률이 3%대로 떨어진 건 2022년 2월(3.7%) 이후 14개월 만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작년 7월 6.3%까지 치솟은 뒤, 8월부터 올 1월까지 6개월 연속 5%대에 머물다가 2월 4.8%, 3월 4.2%로 내려왔다.
물가 상승률이 꺾인 건 석유류 가격이 크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석유류 가격은 1년 전보다 16.4% 하락했는데 2020년 5월(18.7%) 이래 35개월 만에 최대 하락 폭을 기록했다. 체감도가 높은 품목으로 구성된 생활물가 상승률도 3.7%를 기록했다. 1월 6.1%, 2월 5.5%, 3월 4.4% 등 하향세를 보이다가 지난달 3%대로 하락한 것이다.
한국은행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올해 중반까지 뚜렷한 둔화 흐름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김웅 한은 부총재보는 이날 ‘물가 상황 점검회의’를 열고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기저효과 등의 영향으로 에너지 가격과 가공식품 가격 상승률이 상당 폭 낮아지면서 둔화 흐름을 이어갔다”며 “앞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해 중반까지 뚜렷한 둔화 흐름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4%대 근원 물가는 불안 요소
다만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 물가가 여전히 4%대를 유지하는 건 불안 요소다. 계절적 요인이나 외부 충격에 따른 변동성이 큰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근원 물가는 4.6% 상승했고,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기준 근원 물가 지표인 식료품과 에너지 제외 지수의 상승 폭은 4.0%를 기록했다.
또 다른 불안 요소는 상품물가는 3.4% 상승한 반면, 서비스물가는 6.1% 상승했다는 점이다. 서비스물가는 한번 오르면 쉽게 떨어지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석유류 가격이 떨어지면서 물가 지수를 끌어내리는 와중에도 서비스물가는 4월 6%대 상승률을 기록했다. 지금까지 올랐던 석유값, 전기요금 등이 서비스 가격에 시차를 두고 반영된 영향이다. 앞으로 유가가 더 떨어진다고 해도 서비스 가격은 떨어지기 어렵다는 얘기다.
수요 측 물가 압력을 가늠할 수 있는 외식 물가는 7.6% 상승해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외식을 제외한 서비스물가는 5.0% 올라 지난 2003년 11월(5.0%)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김보경 통계청 경제동향통계심의관은 “하반기엔 소비자물가가 전반적으로 안정될 것으로 보이지만 전기·가스 요금 인상 시기나 국제 유가 등 국제 원자재 가격과 환율 등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라고 했다.
◇정책 기조, 물가→경기로 선회할까
여러 불확실성이 있긴 해도 통상 3%대 물가는 고물가에서 저물가로 가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정부는 앞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올 2분기(4~6월) 3%대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흐름이 몇 개월간 지속된다면 경제 정책의 무게중심이 ‘물가 안정’에서 ‘경기 부양’으로 옮겨갈 수 있다. OECD 회원국 중 3%대 이하의 물가를 기록 중인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스페인(3.1%), 일본(3.2%) 등 5국에 불과하다. 고물가가 계속되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정책 운용 폭이 커진 셈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정부 출범 이후 경제정책 최우선 과제는 물가였다”며 “2분기 3%대 물가상승률에 안착한다면 경기 방어로 무게중심을 이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가 안정이 전제되면 소비와 투자를 확대하는 경기 부양책을 쓸 수 있다는 얘기다.
또 미뤘던 전기 요금 인상 등을 단행할 여지도 커졌다. 전기료 상승으로 인해 물가가 다소 상승하겠지만 물가가 4~5%대였을 때보다 국민이 체감하는 부담은 조금 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1분기 kWh(킬로와트시)당 약 13원을 올린 데 이어, 2분기 7원 안팎을 올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여론을 의식해 인상을 보류했다. 한전 영업손실은 지난해만 32조6000억원에 달하고, 올 1분기는 5조3000억원가량으로 추산돼 더 이상 인상을 미루기는 힘든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