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보다 더 가혹했던 삶이 있다. 장편소설 ‘중급 한국어’(민음사)를 낸 소설가 문지혁(43)의 이야기. 소설 속 ‘지혁’은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한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시간 강사이자 ‘무면허 작가’다. 등단의 문턱을 수년째 넘지 못했다. 뒤늦게 출판사에 투고해 낸 책에는 “조잡하고 애매한 소설”이란 감상평이 달렸다. 현실의 문지혁은 이 ‘오토픽션’(자전소설)에 생업의 무게를 더하면 된다. 많게는 3개 대학, 서울과 강원도 춘천을 오가며 동시에 일했다. 그는 “풀타임 강사, 파트타임 작가로 살고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정체성은 그와 반대”라며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글을 쓸 체력이 남아있지 않아 ‘현타’(현실 자각 타임)를 느낀다”고 했다.
현실의 고통이 소설을 빚어냈다. ‘한동원’. 작가가 4년 전 한 공모전에 이번 소설의 전작인 ‘초급 한국어’를 투고할 때 사용한 가명이다. 당시 강의를 나가던 한예종, 동국대, 강원대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만들었다. 2010년부터 그때까지 세 권의 장편, 한 권의 소설집을 냈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무면허 작가’로서 자격지심과 재능의 한계를 느끼던 때, 마지막으로 자신의 얘기를 소설로 썼다. 당선되지 못했지만 최종 심사 대상에 올랐다.
“그만두려니까 억울해서 썼습니다. 가명으로 응모했을 뿐인데 누군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제 책을 읽고 평가해줬다는 게 아이러니하고 감사했습니다.” 힘을 얻어 다시 투고했다. 작가를 꿈꾸는 지혁이 미국 뉴욕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내용의 ‘초급 한국어’(2020)는 그렇게 탄생했다. 4쇄(6000부)를 찍었고, 작가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각인시켰다.
이번 작품의 재미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지혁이 사실은 배우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지혁은 학생들에게 ‘인물이 일상에서 비일상의 세계로 넘어갔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미세한 변화가 생긴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비일상의 경계는 애매하다. 어머니가 죽고, 난임 시술 끝에 딸이 태어나고, 육아는 매일 반복된다. 일상을 반복하며 지혁은 점차 깨닫는다. “되풀이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 되풀이만이 사랑할 만하다. 되풀이만이 삶이다.”
작가는 “전작이 ‘상실’을 향해 가는 소설이라면, 이번 작품은 ‘획득’을 향해 가는 소설”이라며 “지혁은 자녀의 세계를 만나, 거기에서도 딸의 언어를 배운다. 전작보다는 희망적인 결말을 맺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책을 통해 “인생은 동그라미도 엑스도 아닌 삼각형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우리는 보통 낙원을 꿈꾸거나, 자기 삶을 지옥이라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미결정 상태의 세모에서 살아가요. 우리 사회는 동그라미와 엑스를 지나치게 강조하지만, 주어진 삶의 조건에서 어떻게 의미와 만족을 찾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삶을 똑바로 바라봐야 해요.”
‘무면허’라는 작가의 아픔은 점차 아물고 있다. 이제는 ‘미등단’이란 흉터가 훈장처럼 느껴진다. “저는 ‘등단’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쓴 적이 없고, ‘데뷔’라는 표현을 항상 썼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남들이 저를 ‘미등단 작가’라고 부르니, 인정하려고 합니다. 누군가 저의 그 모습을 중요하게 봤다면, 저는 그런 사람인 거니까요. 40~50년을 미등단 작가로 남는다면 그것도 나름 의미 있지 않을까요?”
작가는 이번 책의 시리즈 번호에 의미를 뒀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42번. 둘째 딸이 태어난 날이 작년 4월 2일이다. 아내의 출산 일정에 맞춰 4월 1일 책의 원고를 다 썼다고 한다. 그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제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다르게 만들었다”며 “책은 언젠가 두 아이에게 도착할 편지”라고 했다. “문학은 카카오톡, 문자처럼 바로 전달되는 게 아니라 우편처럼 지연돼 도착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비효율적이라 하겠지만, 우회 과정에서 무언가를 체험할 수 있기에 중요한 거죠.”
오토픽션 시리즈의 다음 제목은 ‘고급 한국어’가 아니라 ‘실전 한국어’라고 한다. “고급은 너무 교만해 보이잖아요. 7~8년쯤 지나 제 인생을 다시 한번 기록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