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어느 날, 강원체고 1학년이던 그에게 이원호 감독(현 철원군청 감독)은 웃통을 벗어보라고 했다. 상체를 찬찬히 훑어본 이 감독은 “너는 딱 80㎏급 몸이야. 이 체급으로 가자”고 했다. 태권도 국가대표 박우혁(23·삼성에스원)이 80㎏급에 운명을 건 순간이었다.
남자 80㎏급은 의미가 좀 다르다. 역대 올림픽 최다인 12개의 금메달을 딴 종주국 한국도 자존심을 번번이 구긴 ‘마의 체급’이다. 태권도는 2000년 시드니 대회부터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치러졌는데 한국은 그동안 80㎏급에서 메달을 따내기는커녕 출전조차 못 했다.
태권도는 올림픽 종목 도입 초기 한국에 메달이 쏠리는 것을 막고자 한 국가에서 남녀 2체급씩만 출전을 허가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남자 80㎏급엔 선수를 내보내지 않았다.
이 체급에선 세계선수권 5연속 우승의 스티븐 로페스(45·미국), 아테네·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하디 사에이(47·이란) 등이 강자로 군림했다.
그런데 2016 리우올림픽부터 WT(세계태권도연맹)가 올림픽 랭킹 1~5위에게 자동 출전권을 부여하면서 한국은 모든 체급에 나설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리우와 도쿄올림픽에서도 랭킹 5위 안에 드는 선수가 없어 남자 80㎏급은 올림픽 태권도 8체급 중 한국이 한 번도 뛰지 못한 공백으로 남아 있다.
박우혁은 그런 악조건을 뚫고 나타난 구세주다. 그는 작년 멕시코 과달라하라 세계선수권에서 80㎏급 정상에 올랐다. 80㎏급 세계선수권 1위는 1999년 장종오(현 용인대 교수) 이후 23년 만. 최근 경기도 용인 삼성생명 휴먼센터에서 만난 박우혁은 “그동안 약했던 체급인 만큼 더 책임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곱 살 때 장난기를 줄여보려는 부모가 등 떠밀어 보낸 체육관에서 태권도를 접했다. 그런데 곧 소질이 만개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간 강원도 대회에서 6학년 형들을 모두 꺾고 우승했어요. 그때 태권도에 인생을 걸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이후 강원체고와 한국체육대를 거쳐 올해 삼성에스원태권도단에 입단했다. 태권도는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따는 것만큼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하는 게 어려운데 그는 2019년 이후 5년 연속 태극 문양을 놓치지 않고 있다.
키가 192㎝라 국제 무대에서 신장(身長)에선 크게 밀리지 않지만 문제는 다리 길이. “서양 선수들이 워낙 다리가 길어 ‘이 정도면 피하겠지’ 싶은데 얼굴로 발이 날아든다”며 “신체적 불리함을 스피드와 유연성으로 만회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생각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공격 스타일을 잘 바꿔 대처한다”면서 평소 머릿속으로 대련 시뮬레이션을 끝없이 하는 덕이라 전했다. “화장실에 가서나 누워 있거나 수시로 자주 제 경기 영상을 봐요. 영상 속 나와 싸우는 자신을 그려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수많은 기술을 머릿속에서 시험해 보면 경기에서도 금방 발휘되더라고요.”
박우혁은 29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리는 2023 세계선수권에서 남자 80㎏급 2연패(連覇)에 도전한다. 작년 세계선수권에 출전할 수 없었던 세계 최강 막심 크람트코프(25·러시아)가 개인 자격으로 우승을 겨룰 전망.
박우혁은 “이번 세계선수권과 올해 아시안게임, 내년 올림픽까지 80㎏급에서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업적을 이루겠다”고 말했다.
용인=장민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