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전날보다 13.3원 급등해 1288.6원에 거래를 마쳤다. 코로나 확산 초기 금융 시장 불안으로 달러 가치가 치솟았던 2020년 3월 고점(달러당 1285.7원)을 넘어서며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인 2009년 7월(1293.0원) 이후 거의 13년 만의 최고치로 상승했다. 오후 한때 달러 환율은 1290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전날 미국 4월 소비자물가가 시장 전망치(8.1%)보다 높은 전년 동월 대비 8.3% 올랐다는 발표가 나오자 “고물가가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불안이 번지며 달러 가치가 올라간 영향이다. 주요국 대비 달러 가치를 집계한 달러 인덱스는 104를 돌파하며 2002년 12월 이후 약 19년 반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41년 만의 인플레이션을 꺾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전례 없는 속도와 폭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글로벌 금융 시장은 충격에 빠졌다. 특히 경제 기초 체력(펀더멘털)이 약한 신흥국이 연쇄적으로 큰 타격을 받는 상황이다. 달러의 가치가 올라갈 경우 신흥국은 수입품에 대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수입 물가가 오르고, 안 그래도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더 악화시키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미국의 물가 고공 행진은 글로벌 금융시장에 공포 그 자체다. 미국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급속하게 올릴 경우 시중에 돈이 말라 경기 침체가 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달러 가치가 급등하고 증시가 폭락하고 있다. 미 연준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수습한 후 풀었던 돈을 거둬들이는 과정에 신흥국 시장이 무너졌던 2014년 ‘긴축 발작’과 유사한 충격이 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2일 한국 증시는 전일 미 증시가 급락한 여파로 큰 폭으로 하락했다. 코스피는 전일보다 1.6%, 코스닥지수는 3.8% 급락해 거래를 마쳤다. 12일 홍콩 항셍지수가 2.2%, 대만 가권지수가 2.4% 내려가는 등 아시아 신흥국 증시도 대부분 급락했다. 위험 자산인 비트코인 가격은 12일 10% 가까이 하락하며 9개월여 만에 4000만원 선이 붕괴됐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신흥국 시장도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코로나 방역을 위해 대도시를 봉쇄한 중국의 경우 달러 대비 위안화 가치가 5거래일 연속 하락하며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이 18개월 만에 최고치인 달러당 6.792위안까지 상승(위안화 가치 하락)했다. 로이터는 “2년간의 코로나 충격에서 간신히 회복하기 시작한 신흥국 경제가 20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은 강달러와 인플레이션, 투자 자금 유출 등 동시다발적 충격에 휘청이고 있다”고 전했다. 모건스탠리 신흥국 통화지수는 연준이 기준금리 인상에 가속도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한 4월 이후 4% 하락했다.
문제는 신흥국 시장 불안이 단기간에 해소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연준의 공격적 기준금리 인상은 이제 막 시작돼 연중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연준은 지난 4일 0.5%포인트 기준금리를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하면서 앞으로 두 번 정도 더 0.5%포인트를 인상하고 그 후에도 0.25%포인트씩 기준금리를 계속 올릴 것임을 예고했다. 미국이 경기 회복과 물가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 중에 경기 회복을 포기하더라도 물가 안정을 위해 기준금리를 빠르게 올릴 것이라는 공포가 커지는 상황이다. 게다가 한국은 코로나 발생 초기에 체결한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가 지난해 말 종료돼 지금은 ‘환율 안전판’이 없다.
이승훈 KB금융지주 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미 물가가 계속 8% 넘는 수준에 머무르면서 연준이 경기 침체라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물가를 잡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특히 미국의 증시와 주택 가격 등은 코로나 이후 많이 올라 있어 연준이 최근 증시 폭락을 오히려 ‘거품’을 꺼뜨릴 기회라고 판단해 긴축 속도를 늦추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