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이후 산업국가로 달려가기 바빴던 미국은 나라 밖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금을 화폐로 쓰느냐(금본위제도), 금과 은을 함께 화폐로 쓰느냐(복본위제도)를 두고 유럽이 30년에 걸쳐 고민할 때 미국은 끼어들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20년 34국이 브뤼셀에 모여서 국제 통화제도를 논의할 때는 대표단도 보내지 않았다. 1933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 통화 경제 회의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참가해서 찬물을 끼얹었다. 세계 경제 회복을 위해 ‘킹달러’ 정책 즉, 달러화 가치를 높여달라는 유럽 정상들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때쯤 생각이 바뀌었다. 좋든 싫든 미국이 빠진 국제 통화 질서는 있을 수 없고, 국제 통화 질서 없이는 미국이 바라는 국제무역 증진과 평화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944년 7월 미국으로 44국 대표들을 불렀다.
700명이 넘는 사람을 한꺼번에 수용할 시설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종차별이 걸림돌이었다. 중·저소득 국가들의 유색인종이 미국으로 몰려와 떠들썩하게 국제 회의를 여는 데 대한 거부감으로 백인들이 운영하는 대도시 유명 호텔들이 장소 대여를 거부했다. 결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라는 상당히 후미진 곳에서 회의가 열렸다. 거기서 영국 대표 케인스가 제안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설립안이 채택되었다.
38국이 설립 협정문에 서명을 마치자 1946년 3월 이를 알리는 회의가 열렸다. 이번에도 호텔 확보가 어려워 조지아주 서배너라는 곳에서 열렸다. 케인스가 거기서 충격을 받았다. 프레드 벤슨 미 재무장관이 자신과 영국을 얕보는 듯 행동했기 때문이다. 모멸감을 느낀 케인스가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길로 귀국해서 한 달 뒤 사망했다. IMF의 아버지 케인스가 사라진 뒤 1946년 9월 27일 워싱턴 DC에서 IMF 연차 총회가 처음 열렸다. 달러 패권 시대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