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도로를 주행하면 전방 상황을 인공지능(AI)이 실시간으로 인식한다. 차선과 자동차, 도로 표지판은 물론 낮과 밤, 터널 등 주변 밝기도 구분한다. AI가 카메라를 통해 전방을 보고 분석해 운전 중 발생하는 돌발 상황에도 스스로 대처할 수 있는 자율주행의 기초 기술이다. 차량 전문 반도체 기업 텔레칩스의 김대현 매니저는 기존 기술과의 차별점으로 옆에 있던 ‘반도체 칩’을 집어 들었다. AI 가속기로 알려진 신경망처리장치(NPU)를 통해 한 개의 반도체로도 다양한 정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매니저는 “기존에는 자율주행을 위해 여러 개의 칩을 사용해야 했는데, 이제는 ‘올인원’처럼 하나로 해결할 수 있게 되면서 비용이 크게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 9일 서울 엘타워에서 개최한 ‘반도체 연구개발(R&D) 쇼케이스’에는 고성능 AI를 위해 개발된 반도체 칩이 다수 공개됐다. 텔레칩스는 이 밖에도 하나의 칩으로 내비게이션과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올어라운드뷰, 운전자모니터링시스템(DMS) 등 5가지 시스템을 동시에 처리하는 시연도 공개했다. 기존 그래픽 프로세서(GPU) 대신 AI에 특화된 NPU를 사용해 반도체의 개수를 줄이면서도 더 많은 시스템을 작동할 수 있었다.
◇떠오르는 AI 반도체
데이터센터에 특화된 AI 반도체를 개발한 사피온코리아의 시연도 눈길을 끌었다. 자사가 개발한 반도체 성능을 보여주기 위해 AI의 학습 속도를 측정하는 ‘레지넷-50(ResNet-50)’ 시험을 공개했다. 레지넷-50는 AI가 수만 장의 사진을 실시간으로 인식해 각각의 사진에 사람, 다람쥐, 자전거 등 어울리는 단어를 대입하는 AI 학습 모델로 반도체의 성능이 높을수록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사진을 처리할 수 있다. 사피온코리아가 개발한 AI 반도체는 초당 6500장의 사진을 처리한 반면, 일반 GPU는 2500장밖에 처리하지 못했다. AI 반도체의 성능이 두 배 이상 뛰어났지만 사용 전력도 30% 적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인간의 소뇌(小腦)처럼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뉴로모픽 기술을 소개했다. 소뇌는 몸의 균형을 잡고 자연스럽게 동작할 수 있도록 운동을 미세하게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KIST는 소뇌의 신경망을 모사한 AI 반도체를 만들어 AI가 숙련된 운전자처럼 차량을 운전할 수 있게 하는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운전자가 엑셀을 밟는 시점이나 핸들 조작 정도 등을 AI가 학습해 사람의 운전 습관을 따라하는 것이다. 김재욱 KIST 인공뇌융합연구단 선임연구원은 “자율주행과 인간형 로봇 등 미세한 움직임이 필요한 곳에 해당 기술이 적용되면 저전력으로도 다양한 동작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반도체 미래 기술 로드맵’ 제시
이날 공개된 반도체 칩은 저전력ㆍ고성능을 강조한 AI 알고리즘에 특화된 NPU가 다수 공개됐다. 챗GPT와 같은 초거대 AI 모델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GPU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운영 비용과 필요 성능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AI 성능을 높이는 학습 단계에서 AI를 실제 활용하는 추론 단계로 넘어갈수록 전력과 가격 효율성이 높으면서 데이터 처리 속도가 빠른 NPU의 활용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권대웅 한양대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어떤 NPU가 얼마나 전력을 아낄 수 있는지에 대한 경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과기정통부도 반도체 기술이 국가 경쟁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정부 중심의 중장기 전략을 마련하기로 했다. ‘반도체 미래 기술 로드맵’을 통해 AI 반도체와 6G 이동통신 반도체, 차량용 반도체의 원천 설계 기술을 선점하고 강유전체와 같은 새로운 소자 기술을 개발하는 등 차세대 기술 개발로 반도체 초격차를 유지하겠다는 전략이다. 이종호 과기부 장관은 “기업은 가까운 미래에 양산이 담보되는 기술을, 정부는 공정, 설계, 시스템 등에 대한 중장기 투자로 신기술 마중물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