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연임에 성공하며 장기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있는 다니엘 오르테가(오른쪽) 니카라과 대통령과 그의 부인인 로사리오 무리요 부통령. /로이터 뉴스1

중미 니카라과의 좌파 독재 정권이 민주 세력 최후의 보루인 가톨릭 탄압에 본격적으로 나섰다고 뉴욕타임스(NYT)가 23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장기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오르테가 정권이 야권과 언론, 시민단체 등을 짓밟은 데 이어 마지막 남은 민주 양심 세력의 씨를 말리려는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이날 외신 보도에 따르면 니카라과 경찰은 지난 19일 마타칼파 시내에 있는 롤란도 호세 알바레스 주교가 있는 성당의 주교관을 급습했다. 알바레스 주교는 수도 마나과로 이송돼 구금됐다.

알바레스 주교는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다니엘 오르테가(77) 대통령의 독재 행태를 강하게 비판해온 인물이다. 오르테가 정권이 최근 가톨릭이 운영한 라디오 방송국 7개를 폐쇄하자 트위터에 ‘그렇다고 신의 말씀을 잠재우진 못할 것’이라고 썼다.

현직 주교가 구금되자 인구 절반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니카라과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NYT는 “알바레스 주교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수십 년간 정치적 이유로 구금된 성직자 중 최고위”라며 “니카라과 독재 정권이 ‘마지막 양심’으로 버텨온 가톨릭 사제들마저 침묵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전했다. 오르테가 정권은 지난 3월엔 니카라과 주재 교황청 대사를 돌연 추방했다. 6월엔 자선 활동을 벌이던 수녀회를 폐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1일 이런 상황에 대해 “걱정과 슬픔 속에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브라이언 니컬스 미 국무부 서반구 담당 차관보는 “오르테가의 공격은 종교의 자유는 물론 표현의 자유에도 큰 타격”이라고 비판했다.

국제사회의 우려 속에 종교계까지 칼날을 겨눈 오르테가 대통령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독재자가 된 정치인이다. 1979년 산디니스타 좌익 혁명으로 43년간 3대(代)가 니카라과를 통치한 소모사 일가를 축출하고, 5년 뒤 대통령에 올랐다.

당시 니카라과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가 ‘이란-콘트라 스캔들’이다. 1980년대 초반 미 중앙정보국(CIA)이 ‘적성 국가’였던 이란에 비밀리에 무기를 판매한 뒤 그 대금을 오르테가가 이끄는 좌파 혁명정부에 맞서는 콘트라 반군을 조직하는 데 사용했던 일이 밝혀진 사건이다.

경제 실정으로 민심을 잃어 1990년 재선에 실패한 오르테가는 2007년 재집권에 성공했다. 당시 그는 과격한 좌파 게릴라 지도자 이미지에서 벗어나 친기업 노선을 주창하며 대선에서 승리했는데 그 선거 운동을 주도한 이가 아내이자 현 부통령인 로사리오 무리요(71)였다.

혁명 시절부터 함께한 오르테가와 무리요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 심지어 무리요는 이전 결혼에서 낳은 친딸이 1998년 오르테가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자 딸이 아닌 오르테가 편에 서며 그를 최악의 스캔들에서 구해냈다. 둘은 2005년 정식 결혼했다.

오르테가는 재집권 이후 헌법을 바꿔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고 정적들을 제거하며 장기 집권의 길을 닦았다. 무리요가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는 각종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둘은 2016년 대선에서 나란히 대통령과 부통령이 되면서 세계 최초의 ‘퍼스트 커플’이 됐다. 2007년부터 5년간 부통령을 지낸 제이미 모랄레스가 “니카라과 정부는 두 개의 머리를 가졌다”고 할 만큼 무리요 부통령은 니카라과의 ‘실세’로 통한다.

‘마녀(bruja)’라 불리기도 하는 그는 공식 석상에서도 히피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옷차림과 수많은 장신구로 시선을 끈다. LA 타임스는 “미신을 믿는 그는 악령을 쫓기 위해 터키석이 들어간 반지를 끼고 귀신이 나온다며 대통령 관저에 사는 것도 거부했다”고 전했다.

니카라과 출신으로 록밴드 롤링스톤스 리더 믹 재거의 전처(前妻)인 사회운동가 비앙카 재거는 더타임스 인터뷰에서 “무리요는 가톨릭 지도자들이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정치 단체와 공모하고 있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무리요가 부통령으로 합류한 이후 부부는 2018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계기로 탄압의 수위를 본격적으로 높이고 있다. 작년 11월 대선을 앞두고는 유력 대선 주자 및 야권 인사들을 무더기로 체포한 뒤 손쉽게 4연임(총 5선)에 성공했다.

니카라과 정부는 최근 몇 달 새 1000개가 넘는 시민단체에 대한 강제 폐쇄 조처를 단행했다. 주요 언론들도 정부 압박에 줄줄이 문을 닫으며 종이 신문이 사라졌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년간 200여 명의 정치인과 사회운동가, 언론인 등이 감옥에 갇혔다”며 “2018년 이후 나라를 떠난 정치 난민도 12만명이 넘는다”고 전했다.